오늘 정독일지의 본문은 창세기 45~47장이었다. 창세기 45장에서 드디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창 45:3)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가요?” 그러나 형들은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그러자 형들이 요셉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

 

형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이집트의 총리이신 분이 갑자기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라고 했을 때 형들이 정말 얼마나 놀랐을까? 시기와 질투에 눈먼 나머지, 얄미운 동생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고 나서, 이집트에 먹을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난처한 상황에 빠졌던 순간에는 '그 옛날에 동생을 팔아넘긴 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벌을 받는 것인가'라고 생각할만큼 형들에게도 요셉에 대한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랬는데 그 동생이 내 눈 앞에, 그것도 이집트의 총리로서 서 있다니!!! 그 순간 형들의 마음에 놀라움도 있었겠으나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았을까?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동생에게 나쁜 짓을 했던 과거가 있기에 형들은 이제 동생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놀라고 두려웠을 형들에게 요셉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한다. 

 

(창 45:5) 하지만 이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이 곳에 판 일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창 45:6) 벌써 이 년 동안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않고 있어요. 더구나 앞으로도 오 년 동안은 심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 45: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에요.
(창 45:8) 그러니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의 모든 일을 제가 맡고 있답니다. 저는 모든 이집트 땅의 주인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들의 죄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판 것이 형들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형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자신을 이집트에 판 일로 마음 아파 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거지?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자신에게 엎드려 빌면서 용서를 구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형들을 위로한다고? 그런데 요셉이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뒤이어 나온다.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요셉은 자기 인생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이, 사사로운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난 가운데 깨달았던 것이다. 멀쩡히 아버지의 총애받는 아들로 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집트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어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서 지내다가, 인고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파라오의 꿈을 해몽했다가 또 갑자기 이집트의 왕 다음으로 높은 2인자 총리가 되었던, 롤러코스터 같은 요셉의 인생이, 철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사람의 관점에서는 요셉이 엄청난 대인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떻게 그런 형들을 용서할 수 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라고 할 수 있겠으나 더 본질적인 부분을 묵상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어쩌면 내 인생은 이다지도 꼬일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연민하고 상처와 원망 속에 살아왔다면 이런 용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 중에 언제나 자신과 함께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고, 하나님께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왕의 죄수들의 감옥에서, 자신을 높여주시는 것을 보며 이것은 정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과연 인생에 고난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고난 중에 나 자신을 바라보며 연민하고 후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를 더욱 깊이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다.

 

요셉은 분명히 자신을 이 곳,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억울하다 여기면 그 탓을 사람에게 하거나, 하다하다 안되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시고, 고난과 연단의 세월 후에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결코 내 힘, 내 능력으로 올라선 자리가 아님을 그 누구보다 요셉은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그저 '이상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일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명령하셨다. 

(벧전 1:14) 전에는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벧전 1: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벧전 1:16) 성경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용서를 할 수 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겸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겸손을 가질 수 있다. 

 

단, 이런 요셉과 같은 용서와 겸손의 모습을 가지려면 요셉이 늘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형통한 삶을 살았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와 겸손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선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용서와 겸손은, 단순히 그의 인생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었기에 더욱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순종의 과정이었음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가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집트를 나오게 될 것을,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던 시절에 이미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요셉의 용서와 겸손은 개인의 삶의 선택 같아 보이나 사실 요셉 한 사람이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성취되는, 놀라운 과정으로 쓰임받았다. 나의 개인의 삶의 순종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키(key), 핵심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들은 거의 다 이루어졌고, 이제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성경에 무수히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면서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말세의 때에, 오늘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한 조각으로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이 될지를 생각하여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성취되기를 바라고 주님께 나를 내어드릴 수 있는 거룩한 일에 더욱 도전해야겠다! 

 


 

좋으신 주님,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봅니다. 자꾸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상황에서 이게 어디냐 하는 저의 안일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의 수준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빚으시고 다듬어주시옵소서! (하지만 너무 아프게는 마시고 ㅠㅠ 제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살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ㅎㅎㅎ)

 

용서와 겸손은 결코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가운데 용서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것임을 봅니다. 주여, 제 삶의 많은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나고, 그 아는 것이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진짜 삶이 되고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말만 앞서지 않고 마음과 행동이 따라갈 수 있게 성령님 날마다 저를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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