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레마의 말씀만 정리해야겠다.



[요9:27, 쉬운성경]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다 말해 주었는데, 왜 들으려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다시 듣고 싶으십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그러십니까?"

[요10:6, 쉬운성경]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10:24-25, 쉬운성경]
24 유대인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들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게 할 작정입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터놓고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25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였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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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25-26, 쉬운성경]
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40, 쉬운성경]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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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0:17, 쉬운성경] 따라서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얻게 되고, 말씀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오늘의 성경 정독 본문은 요한복음 7~8장이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나를 돌아보게 해주시는 말씀은!

 

(요 8:29)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언제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므로,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요 8: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텐데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보내셔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니 하나님과 같은 분이나 이 땅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런 예수님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신다니! 내 안에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참으로 많은데....ㅜㅜ 주여, 용서해주시고 저를 새롭게 해주소서!

 

(요 8:43) 너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버지 마귀에게 속하여 너희 아버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마귀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마귀는 진리 안에 서지 못한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쟁이의 아버지이므로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요 8:45)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이다.
(요 8:46) 너희 중에 내가 죄인이라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왜 나를 믿지 않느냐?
(요 8:47)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뜻과도 같다.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아담의 원죄로부터 죽었던 영이 살려진 자가 되었으나 나의 혼은 아직까지 세상에서의 경험과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 자리가 있다.

 

그렇다보니 내 혼이 진리를 따르면 내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지만 내 혼이 내 생각과 내 감정 즉, 세상으로부터 받은 교육에 의거한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마귀에게 속하여, 나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 육체의 아버지인 마귀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롬 6:12) 그러므로 죽게 될 여러분의 몸에 죄가 왕노릇 하여 몸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롬 6:13) 또한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롬 6: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에게 왕노릇 할 수가 없습니다.

 

내 혼이 더욱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말로 내 몸이 내 생각과 내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의를 행하는 도구로서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나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이며 결코 죄가 내게 왕노릇을 할 수 없다. 

 

 


 

주님, 하루에도 수십번 나의 혼은 죄를 짓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쁘하게 하지 못할 생각과 감정들을 품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더욱 진리로 채워져서 고민없이 진리만 따르게 하옵소서!

 

나는 이미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라 하셨사오니 죄가 결코 내게 왕노릇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새기고 붙들고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성령님께서 유독 나의 마음을 두드리신 부분은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였다. 

 

(요 5:1) 얼마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근처에 기둥 다섯 개가 있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요 5:3) 이 곳에는 병약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요5:4) 없음 - 어떤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가끔씩 주의 천사가 연못으로 내려와 물을 휘저었는데, 이렇게 휘저어 놓은 연못에 제일 처음 들어간 사람은 그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곳으로 여겨졌기에, 온갖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기다린 곳이었다. 

 

(요 5:5) 거기에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 5:6)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시오?”
(요 5:7) 병든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가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앞서서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자마자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누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질문은 "낫기를 원하시오?"라는 것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이 말씀이 얼마나 본질적인 질문인가를 성령님께서 돌아보게 해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에 대해 그 병자는, 내가 살을 조금 더 붙여서 설명을 해보자면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야 치유를 받을 수 있는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병이 낫지 않았고 여지껏 이 자리에 있었다"는 내용의 답을 한다. 

 

예수님의 질문은 "낫기를 원하시오?"였는데, 이 병자의 답은 그 질문에 "네! 간절히 낫기를 원합니다!"가 아니라, 38년 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던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내 영혼이 진짜로 원하는 것'보다도 '난 이것 때문에 안돼, 난 이래서 못해, 환경이 이렇잖아, 어쩔 수가 없잖아?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것이 그에게는 더 크고 우선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죄인 '나 중심적인 사고' 안에 그가 갇혀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사람이 예수님의 질문처럼, 정말로!!! 낫기를 원했다면 과연 그 자리에 계속,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까? 묵상을 하다보니 결국 그의 영혼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는 채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처음에는 낫기를 원해서 베데스다 연못가까지 나아왔겠으나 어느새 이 땅에서 도저히 안되는, 나 중심의 생각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의 감옥 속에서 정말로 내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돌아보지 못한 채 '언제가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에 안주하여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채로 그 연못가를 배회했을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내 안에 그려진다. 그 당시 이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다보니, 나 또한 순간 순간 정말로 나의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채 '나'라는 감옥 속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상황과 환경에 눌리고 끌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를 돌아보게 된다.

 

낫기를 원하시오?

살기를 원하시오?

구원받기를 원하시오?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오?

 

예수님은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하시는데,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는 이게 안되고요, 나는 이게 힘들고요, 상황은 이래서 안되고요, 현실이 이래요" 라며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성경 묵상은 이래서 필요하고, 이래서 좋다. 땅에 머무르던 나의 시선을 성령님께서 하늘 차원으로 끌어 올려주신다.)

 

우리 인생에 있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음 앞에서는 지금 내가 문제라고 하는 것들, 어쩔 수 없다 말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이 모두 무의미해져버린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바로 곁에서 여러 번 지켜보았던 나는,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모든 우선순위가 재정립되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가치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사람은 모든 빈 껍데기들을 내려놓고 가장 원초적인 간구를 하게 된다. '살고 싶다'라고...

 

38년 된 병자도 결국 '낫고 싶다'는 것이 '살고 싶기 때문에' 낫고 싶은 것이었기에, 자기도 나름대로 살 길을 찾고자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정말로 그의 영혼의 본질적인 간구를 놓치고,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가득 채운 채로 남탓만 하며 베데스다 연못가를 떠날 수도 없고, 낫지도 않는 어쩡쩡한 상황에서,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고, 그에게 본질을 새겨주신다. 그러나 그는 낫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람,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눈 앞에 계셔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중심적으로, 내 식의 말만 쏟아냈다. 그러나 사랑이신 예수님은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는 채 이 땅의 말을 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내가 안되는 이유 수백가지를 끌어안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며 그 죄의 굴레에 갇혀 있는 영혼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순했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그 때 그의 안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또 쏟아냈겠지. "지금 내 말을 이해 못했어요? 나는 지금 병을 앓고 있다고요, 이미 38년이나 되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일어나요? 게다가 침상을 들라고요? 이 무거운걸? 나 지금 아픈데? 침상을 들고 걸을 수 있으면 내가 안 아픈 사람이게? 내가 왜 베데스다에 와 있는데, 나으려고 와 있잖아요? 내가 지금 아직 아프다고! 나는 안된다고! 아무도 나를 안 도와줘서 병이 안 나았다고! 그래서 못 일어난다고! 근데 일어나라고? 근데 침상을 들라고? 근데 걸어가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바로 요놈의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해져서 이게 '나'라고 믿는 바로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내 감정, 내 사고, 내 관념" 말이다. 이걸 어떻게 버리라고, 이게 없으면 내가 아닌데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이걸 버리라고 하느냐 싶겠으나,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셨고, 내가 지고 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메라 하셨다. 이게 영생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제시해주셨는데도 그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내 말이 너무 앞서는 것이 문제다. 내 말은 결코 나를 살릴 수 없음에도 그것을 미련하게 붙들고선, 진리를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나도 모르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해주시려고, 살리시려고 작정을 하셨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마자 그 즉시, 그 남자는 병이 나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본질적인 그의 영혼의 원함이 무엇인지 질문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에 그 말씀을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되겠다!라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기에 하늘에서 작정하신 치유가, 이 땅에서 그의 믿음과 합해져 이루어지는 순간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신의 원함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상황과 환경에 끌려, '나'라는 감옥 속에서 죽은 것 같이 살아가던 한 영혼에게 찾아오셔서 치유의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병이 치유된 그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보시오, 당신은 이제 다시 건강해졌으니, 더 악한 일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이 땅에서의 모든 어려움은 결국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에, 그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더 악한 일이 닥치지 않게 다시 죄를 짓는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해결이 중요하고, 당장 이 땅에서 나를 죽일 것 같은 일들로부터 놓여나기를 원하나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상기시켜주신다. "낫기를 원하시오?"라는 질문처럼 말이다. 

 

(요 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
(요 5:40) 하지만 너희는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야곱의 고백처럼 고달프고 고생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결국 본질은 '나'라고 하는 존재적인 죄의 굴레로부터의 '구원'과 '영생'(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고 내가 지금 예수님께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오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질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겠다. "낫기를 원하시오?"

 

당장 나를 죽일 것 같은 문제 앞에서 내 영혼의 아주 본질적인 원함이, 간구가 무엇인지를 무시하지 말자. 내 영혼의 신음이 들린다면 내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꾸만 내 영혼의 원함을 가리우고 나를 속이는 나의 생각들에 진리의 빛을 비춰달라고 간구하며,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하신즉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주님, 성경을 보면 항상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땅의 일을 말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나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죄악의 어둠 속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성경의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더 사실적이고 더 진짜인 말씀의 성취를 가로막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현실에서 어렵다 하는 문제들 앞에서 자꾸만 내 말이 앞서고,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의 감옥에 갇혀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앞으로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구원과 영생에 대해 더욱 깊이 묵상하며 하늘 차원의 삶에 대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시고, 진짜로 하늘 차원의 삶을 살아내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연수 안에서 사명을 다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영혼 안에서의 울림은 참으로 큰데, 이것을 사람의 말로 풀어내고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 제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셔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표현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점점 나는 사라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남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정독 본문이 이제 요한복음으로 넘어갔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내 눈이 세례 요한에게 머물게 하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게 한 사람이었다. 

 

(요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 1:7) 요한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 1:8) 요한 자신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명을 가진 자였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었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 몇 사람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게 하였다(요1:19)

 

(요 1:23)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주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만들어라’ 하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며 이 말씀에 얼마나 마음이 울컥하던지...세례 요한은 진정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만들어라' 하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라고 자신을 정의하였다. '나'는 없고 주님을 위해 외치는 사람의 '소리'로만 존재할 수 있다니...정말 엄청난 수준이다. 나는 아직도 매순간 내가 하고 싶고, 하기 싫고, 나는 이게 좋고 저건 싫고, 여전히 '나'라는 존재 때문에 씨름하는 경우가 많은데ㅜㅜ 세례 요한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길을 예비하라고 먼저 보내신 사람의 수준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세례 요한이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을 보며, 그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가진 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까?"라고 따졌지만 요한은 당당했다. 

(요 1:26)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십니다.
(요 1:27)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격을 따져 묻는 자리에서조차 내 자격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증명하려 들지 않고,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예수님께 돌린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계시는데, 그분은 내 뒤에 오시기는 하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아! 이 말씀도 정말 울컥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로 '나'라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직 그가 오시지 않아서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으나 실제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겸손이 아니라 그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이신 분이시기에 그는 감히 그분과 비교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진실로 낮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라고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아래와 같다. 

(요 1:33) 나 역시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분이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바로 그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34)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았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누가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바로 그분인 줄 알아라" 라고 하셨기에,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여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나온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다. 

(요 3:12) 내가 너희에게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말했는데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데,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실 때,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을 가지고 증명하셨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깨닫지도 못할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하시는 이 부분에서, 세례 요한은 바로 이 '하늘의 일들'을 듣고 믿고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위로부터 오신 분, 곧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으로서,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시면서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에 반해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하는 수준에 있기 때문에 '하늘의 일들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아멘아멘! 땅에 속한 사람의 수준에서는 하늘의 일을 말해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기에 하늘의 일을 알려주시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태에서부터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선택받아 이 땅에 보내진 것이었으며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는 자신이 쇠하여 지는 것에 대해 조금도 요동하는 마음없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요 3:28) 너희들은, 내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분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증인들이다.
(요 3:29) 신부의 주인은 신랑이다. 신랑을 기다리며, 그가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한다. 나의 기쁨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나의 기쁨이 이제 이루어졌다.
(요 3:30)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고, 세례 요한은 눈 앞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빛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 그대로를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음을 얻도록 하는 일에 쓰임받았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나는 없고 예수만이 사는, 주의 종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오늘 내게, 이 모습이야말로 내가 회복해야 하고 또한 지향해야 하는 주의 종의 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듯하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오늘의 말씀 안에서도 레마의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두드리시고 정신차리게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으며 저 또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거듭난 인생으로서 그 빛을 만났으니 오직 그 빛을 증언하는 일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함에도 자꾸만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죄된 육성이 깨어지고 그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은 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을 사는 동안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모습을 볼 때 아직도 많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자리가 있습니다. 주여,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제 안에 이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이 말씀으로, 기도로 파쇄되게 하옵소서! 주의 종으로서 더욱 거룩히 구별된 자가 되도록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주만 따르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성경정독의 본문 창세기 48~50장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 중에 하나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다. 창세기를 묵상하는 내내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었다.

특히 오늘 본문 중에 성령님께서 내게 레마의 말씀으로 주셨던 것은 아버지 야곱이 임종 전에 요셉과 두 손자를 불러 축복해준 것과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요셉에게 주었던 축복에 대한 부분이었다.





[창48:3-6, 쉬운성경]
3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나에게 복을 주셨다.
4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고 많은 백성의 아버지로 삼아 주겠다.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영원히 주겠다.'
5 네 두 아들은 내가 오기 전에 이 곳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부터 그 애들은 내 아들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내 아들이 될 것이다.
6 너에게 다른 자녀가 생긴다면 그 애들은 네 자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애들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마찬가지로 땅을 받게 될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루스(벧엘이 된 곳)에서  자기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요셉에게 전한다. 임종 전에 자녀에게 하는 유언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게 마련일 것인데, 이 자리에서 야곱은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그만큼 야곱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인의 노력으로 일군 어떤 것을 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전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부럽고 또한 소망되는 일인가? 나 또한 죽기 전에 내가 이룬 것을 자랑하듯 말하는게 아니라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고 전하는 자가 되고 싶다!


[창48:21-22, 쉬운성경]
21 그리고 나서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네 조상의 땅으로 다시 데리고 가실 것이다.
22 너에게는 네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주겠다.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세겜 땅을 너에게 주겠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은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를 조상의 땅으로 다시 데리고 가실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주겠노라 약속한다.

그리고 야곱은 12명의 아들들에게 각각 그들이 살아온 세월 가운데 아버지의 눈에 보였던 것들을 이야기하며 축복과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 중에서도 요셉은 가장 길고 풍성한 축복을 받았다.

[창49:22-26, 쉬운성경]
22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 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23 사람들이 그를 화살로 맹렬히 공격하고, 무섭게 활을 쏘아댄다.
24 그러나 요셉의 활이 더 잘 맞고, 요셉의 팔이 더 힘세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땅의 샘물로 너에게 복을 주신다. 네 아내들이 많은 아이들을 낳게 하심으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네 짐승들이 많은 새끼들을 낳게 하심으로 너에게 복을 주신다.
26 네 아버지의 받은 복은 영원한 산들의 복보다 크고, 변치 않는 언덕들의 복보다 크다. 이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내리기를. 자기 형제들과 헤어졌던 자의 이마에 내리기를."


요셉이 아버지의 유언에서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것을 보니, 그가 일찍이 아버지 곁을 떠나 이방 땅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난과 연단의 시간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하나님은 야곱의 유언을 통해 요셉을 '자기 형제들과 헤어졌던 자'라고 칭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 받으며 이집트에서 했던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신 것이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 신약성경의 말씀이 떠올랐다.

[막10:29-30, 쉬운성경]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집과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또는 밭을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핍박과 함께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그리고 밭을 백 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눅18:29-30, 쉬운성경]
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배로 받을 것이요.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이 땅에서 행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았으나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약속 받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집과 형제, 자매, 부모, 자녀 등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버릴 수 없다(차선으로 둘 수 없다)하는 것들을 버렸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비록 핍박이 따를 수는 있으나 밭을 백 배로 받을 것이요,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신 것이다.


[전12:14, 쉬운성경]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계21:3-4, 쉬운성경]
3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요셉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낱낱이 기억하시고, 그에게 이 땅에서도 형통한 복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복도 풍성하게 주셨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반드시 갚아주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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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고도 위대하신 하나님!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계시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깐이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영원한 것을 위해 오늘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심는 것에 게으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의 중심과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주실 상벌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할 때 매 순간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더욱 의식하여 죄를 멀리하고 진리만을 좇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의 본문은 창세기 45~47장이었다. 창세기 45장에서 드디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창 45:3)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가요?” 그러나 형들은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그러자 형들이 요셉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

 

형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이집트의 총리이신 분이 갑자기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라고 했을 때 형들이 정말 얼마나 놀랐을까? 시기와 질투에 눈먼 나머지, 얄미운 동생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고 나서, 이집트에 먹을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난처한 상황에 빠졌던 순간에는 '그 옛날에 동생을 팔아넘긴 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벌을 받는 것인가'라고 생각할만큼 형들에게도 요셉에 대한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랬는데 그 동생이 내 눈 앞에, 그것도 이집트의 총리로서 서 있다니!!! 그 순간 형들의 마음에 놀라움도 있었겠으나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았을까?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동생에게 나쁜 짓을 했던 과거가 있기에 형들은 이제 동생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놀라고 두려웠을 형들에게 요셉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한다. 

 

(창 45:5) 하지만 이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이 곳에 판 일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창 45:6) 벌써 이 년 동안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않고 있어요. 더구나 앞으로도 오 년 동안은 심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 45: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에요.
(창 45:8) 그러니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의 모든 일을 제가 맡고 있답니다. 저는 모든 이집트 땅의 주인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들의 죄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판 것이 형들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형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자신을 이집트에 판 일로 마음 아파 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거지?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자신에게 엎드려 빌면서 용서를 구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형들을 위로한다고? 그런데 요셉이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뒤이어 나온다.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요셉은 자기 인생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이, 사사로운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난 가운데 깨달았던 것이다. 멀쩡히 아버지의 총애받는 아들로 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집트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어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서 지내다가, 인고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파라오의 꿈을 해몽했다가 또 갑자기 이집트의 왕 다음으로 높은 2인자 총리가 되었던, 롤러코스터 같은 요셉의 인생이, 철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사람의 관점에서는 요셉이 엄청난 대인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떻게 그런 형들을 용서할 수 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라고 할 수 있겠으나 더 본질적인 부분을 묵상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어쩌면 내 인생은 이다지도 꼬일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연민하고 상처와 원망 속에 살아왔다면 이런 용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 중에 언제나 자신과 함께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고, 하나님께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왕의 죄수들의 감옥에서, 자신을 높여주시는 것을 보며 이것은 정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과연 인생에 고난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고난 중에 나 자신을 바라보며 연민하고 후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를 더욱 깊이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다.

 

요셉은 분명히 자신을 이 곳,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억울하다 여기면 그 탓을 사람에게 하거나, 하다하다 안되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시고, 고난과 연단의 세월 후에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결코 내 힘, 내 능력으로 올라선 자리가 아님을 그 누구보다 요셉은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그저 '이상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일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명령하셨다. 

(벧전 1:14) 전에는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벧전 1: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벧전 1:16) 성경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용서를 할 수 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겸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겸손을 가질 수 있다. 

 

단, 이런 요셉과 같은 용서와 겸손의 모습을 가지려면 요셉이 늘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형통한 삶을 살았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와 겸손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선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용서와 겸손은, 단순히 그의 인생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었기에 더욱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순종의 과정이었음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가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집트를 나오게 될 것을,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던 시절에 이미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요셉의 용서와 겸손은 개인의 삶의 선택 같아 보이나 사실 요셉 한 사람이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성취되는, 놀라운 과정으로 쓰임받았다. 나의 개인의 삶의 순종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키(key), 핵심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들은 거의 다 이루어졌고, 이제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성경에 무수히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면서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말세의 때에, 오늘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한 조각으로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이 될지를 생각하여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성취되기를 바라고 주님께 나를 내어드릴 수 있는 거룩한 일에 더욱 도전해야겠다! 

 


 

좋으신 주님,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봅니다. 자꾸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상황에서 이게 어디냐 하는 저의 안일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의 수준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빚으시고 다듬어주시옵소서! (하지만 너무 아프게는 마시고 ㅠㅠ 제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살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ㅎㅎㅎ)

 

용서와 겸손은 결코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가운데 용서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것임을 봅니다. 주여, 제 삶의 많은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나고, 그 아는 것이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진짜 삶이 되고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말만 앞서지 않고 마음과 행동이 따라갈 수 있게 성령님 날마다 저를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37:5-8, 쉬운성경]
5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들려주자, 형들은 요셉을 더 미워했습니다.
6 요셉이 말했습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7 우리가 들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내 곡식단이 일어서니까, 형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 곁으로 몰려들더니 내 곡식단 앞에 절을 했어요."
8 요셉의 형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줄 아느냐? 네가 정말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줄 아느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한 꿈 이야기 때문에 그전보다도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이 이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의 형들은 코웃음을 치며 요셉을 미워했었다.


[창37:9-11, 쉬운성경]
9 그후에 요셉이 또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또 형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들어 보세요. 내가 또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보니까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10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도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아버지는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꿈이냐? 너는 정말로 너의 어머니와 너의 형들과 내가 너에게 절을 할 것이라고 믿느냐?"
1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

그 후에 요셉은 또 한 번 비슷한 꿈을 꾸었다. 그들의 현실에서 볼 때는 너무나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일이라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꾸짖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오늘 정독의 본문에서 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왔다.

[창42:6, 쉬운성경] 그 때,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였습니다.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에게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땅에 엎드려 요셉에게 절했습니다.

[창43:28, 쉬운성경] 요셉의 형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종인 우리 아버지는 안녕하십니다. 그분은 아직 살아 계십니다." 대답을 마친 후에 그들은 요셉 앞에서 머리를 숙여 다시 절했습니다.





물론 요셉이 꾼 꿈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 가운데 주신 예언적 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볼수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분이신데, 내가 얼마나 이것을 진실로, 진실로 믿고 기도하고 있었는가 오늘은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한 세월이 얼만데.... 난 분명히 하나님을 믿지! 성경 말씀도 사실이지!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기도할 때 내적인 음성으로 주신 것들을 내가 정말 믿는다면 그 말씀들을 절대 흘려듣지 않고, 더 새기고, 더 붙들고, 이루어질 그날이 오기까지 더 믿음으로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믿음은 가끔, 믿는다 하면서도 그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는.... 즉, 믿는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은 믿고 있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날이다.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못 믿기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내 나름의 방편을 찾으려 머리를 굴린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일까?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도 막연하게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더욱 새기고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다.

야곱이 요셉을 혼내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듯이, 신약성경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해 마음에 새겼던 것이 기억난다.

[눅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눅2:19, 쉬운성경]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였습니다.

[눅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2:51, 쉬운성경]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더욱 진중하고 신실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고, 기억하고, 꼭 붙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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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으신 주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혼내지 않으시고 매일의 말씀 묵상을 통해 부드럽게 터치해주시는 좋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은혜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새기지 못하고 대강 듣고 흘렸던 순간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하나님을 더욱 꼭 붙들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매일 묵상을 기록하게 해주심도 저에게 듣고, 새기라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인줄을 이제 알겠사오니 더욱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믿고 인내하게 하옵소서! 참으로 좋으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의 본문은 창세기 39~41장이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성령님께서 내게 주목하게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오는 복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너무나 잘 알듯이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표면적으로는 그러하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이스마엘 사람들 손에 넘겨져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이끌어가고 계셨음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왕궁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다가 나중에는 억울한 사건에 말려 왕의 죄수들을 넣는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였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실제는 노예요 죄수였음에도 그가 맡은 일은 신분과는 상관없이 관리급이었으며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해 요셉이 있는 곳에 복을 부어주셨다. 그러다가 그는 이집트 왕의 꿈을 풀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아래 있었다. 

 

 

(창 41:16) 요셉이 파라오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꿈을 해몽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위해 해몽해 주실 것입니다.”

(창 41:25) 그 때에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꿈의 뜻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파라오께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 41:32) 파라오께서는 뜻이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기로 굳게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곧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으로 꾸게 하셨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파라오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었기에, 하나님은 파라오가 꿈 해몽을 듣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따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창 41:36) 나중을 위해 그 식물을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그 식물은 이집트 땅에 닥쳐올 칠 년 동안의 가뭄 때 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칠 년 동안 가뭄이 들어도 이집트 백성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창 41:56) 어디를 가도 가뭄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창고를 열어서 이집트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 땅에도 가뭄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창 41:57) 모든 땅의 백성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의 요셉에게 왔습니다. 온 세계에 심한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세말까지 모든 일을 이미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요셉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계획 안에서 이집트에게 부강한 시절을 일정 기간 동안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것을 알려주시며 대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셨다. 그리고 파라오는 요셉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였고,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에, 온 세계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요셉의 창고를 열어 사람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작정하신대로 이루지만, 그 안에서도 피난처되시는 주님을 따르고 구하는 자에게는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데, 다만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이다. 

 

이 부분을 묵상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바로 요한계시록 1:1~3 말씀이다. 

(계 1: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기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 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이 일을 알게 하셨습니다.
(계 1:2)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 1:3)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것을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 역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을 통해 온 세계에 7년 동안의 풍년 이후 7년 동안의 흉년의 시기가 있을 것을 알려주시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피할 길'을 내어주셨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도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 알려주셨고, 순종하기만 하면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지킴받고 보호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이미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계 22:10) 그리고 천사는 내게 지시하였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비밀로 하지 마라.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가 멀지 않았다.
(계 22:11)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계속 악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더러운 그대로 놔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계속 의롭게 살도록 하며, 거룩한 사람들은 계속 거룩하도록 하여라.”
(계 22:12)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내가 상을 가지고 가서,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주며 상을 베풀 것이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계 22:14) 자기 옷을 빠는 자는 복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며, 성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계 22:15) 악하고, 마술을 행하며, 음란하고, 살인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말을 즐겨하던 자들은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계 22:16) 나 예수는 온 교회에 이 모든 것을 증언하기 위해 천사를 보냈다. 나는 다윗의 자손이며 빛나는 새벽별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모든 일을 이미 작정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숨기지 않고 다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진실로 성경의 말씀, 특히 오늘 레마로 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믿고 계속 의롭게, 거룩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주님, 주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숨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알만한 것들로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기웃거린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정말로 내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숨기지 않으시고 성경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채워서, 말세에 있으리라 하셨던 그대로, 이 세상이 망하는 중에도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주님만을 따라가며 피난처 되시는 주님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눅 21:33)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눅 21:34) “네 마음이 방탕과 술취함과 삶의 걱정으로 무겁게 눌리지 않도록 하여라. 그 날이 마치 덫처럼 갑자기 네게 다가올 것이다.
(눅 21:35) 그 날은 온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올 것이다.
(눅 21:36)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피할 힘을 얻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피할 힘을 얻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신 이 말씀을 더욱 주의깊게 새기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되어 내 영혼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내가 중보하는 영혼들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함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특별히 창세기 37장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37장에는 야곱의 가족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당시 17살이었던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은 야곱이 늙어서 얻은 아들이었고, 게다가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에서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를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다른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창 37:3) 요셉은 야곱이라고도 부르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늙어서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아들보다도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소매가 긴 좋은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창 37:4)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꿈을 꾸었다. 하나님의 때는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이다.  

 

(창 37:6) 요셉이 말했습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창 37:7) 우리가 들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내 곡식단이 일어서니까, 형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 곁으로 몰려들더니 내 곡식단 앞에 절을 했어요.”
(창 37:8) 요셉의 형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줄 아느냐? 네가 정말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줄 아느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한 꿈 이야기 때문에 그전보다도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은 본인의 의도와 달리, 그저 그가 꾼 꿈을 말했을 뿐인데 형들에게 더 큰 미움을 샀다. 

 

(창 37:9) 그후에 요셉이 또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또 형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들어 보세요. 내가 또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보니까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창 37:10)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도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아버지는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꿈이냐? 너는 정말로 너의 어머니와 너의 형들과 내가 너에게 절을 할 것이라고 믿느냐?”
(창 37:1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꿈을 또 한번 꾸었다. 그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더욱 질투했고,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그 내용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다. 

 

(창 37:12)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으로 갔습니다.
(창 37: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 떼를 치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려 한다.” 요셉은 “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창 37:14) 요셉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 보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다오.” 요셉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요셉을 떠나 보냈습니다. 요셉이 세겜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시 '어느 날'이 임하였다. 아주 평범했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르게 특별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 날이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그러나 제3자적 시각으로 요셉의 이 어느 날을 바라볼 때,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 날이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는 눈이 비로소 열리는 것 같다.

 

(창 37:18) 요셉의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가까이 오기 전에 요셉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창 37:19)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꾸는 애가 오는구나.
(창 37:20) 저 애를 죽여서 그 시체를 웅덩이에 던져 넣자.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이 저 아이를 죽였다고 말하자.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두고 보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꿈꾸는 애'를 죽여보자고, 그러면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 작당모의를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고, 하나님은 이미 요셉에게 주신 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계획이 있으셨기에, 일정 부분은 형들의 악함을 사용하셨으나 그게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게 막으셨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 잠언 16:4)

 

(창 37:21) 하지만 그 때, 르우벤이 그 계획을 듣고 요셉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 말했습니다. “요셉을 죽이지는 말자.
(창 37:22)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말자. 이 광야의 웅덩이에 저 아이를 던져 넣자. 하지만 해치지는 말자.” 르우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요셉을 그 형들의 손에서 구해 내어 아버지께 돌려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맏형 르우벤의 마음에 요셉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르우벤의 발언으로 이들의 작당모의의 방향은 약간 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르우벤의 생각처럼 진행되지도 않는다.)


(창 37:23) 요셉이 형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형들은 소매가 긴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창 37:24)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웅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의 한 수가 있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르우벤이 요셉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말고 광야의 웅덩이에 던져 넣자고 하자, 형들은 계획을 바꾸어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었는데! 그 웅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 요셉이 해를 입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이 마른 웅덩이를 그 자리에 예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우리를 고난과 연단의 과정으로 몰아가신다 하더라도 정말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까지는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된다. 

 

(창 37:25) 요셉이 웅덩이에 있는 동안 형들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스마엘 사람들은 낙타에 향료와 유향과 몰약을 싣고 길르앗에서 이집트로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창 37:26) 그 모습을 보고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인 다음, 그 사실을 숨긴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나?
(창 37:27) 차라리 요셉을 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버리자. 그러면 동생을 죽이는 죄도 짓지 않게 된다. 그래도 저 애는 우리 동생이고, 우리와 피와 살을 나눈 형제가 아니냐?” 그러자 다른 형들도 모두 유다의 말에 찬성했습니다.
(창 37:28) 그러는 동안,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갈 때에 형들은 요셉을 웅덩이에서 꺼내어, 은 이십 세겔 을 받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곤경에 처하게 한 후,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때마침!!! 이스마엘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기가 막힌 연출의 타이밍이 아니었을까?!!! 그 이스마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유다가 나서서 '요셉을 죽일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서 동생을 죽이는 죄를 피하자'고 하였고, 다른 형들도 유다의 말에 찬성했다. 그래서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서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요셉 스스로는 평생 이집트에 가게 될 일이 있었을까 싶은 이 때에,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로 한 순간에 헤브론 골짜기에 있던 요셉은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늘 똑같을 것 같은 일상이 무너지고, 갑자기 내 인생의 무대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병원이 되기도 하고,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고, 이민을 가게 되기도 하고, 이직을 하게 되기도 하고, 감옥에 가게 되기도 하고, 부도가 나기도 하고....하지만 이것도 정말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싶은 상황이라면? 이건 도무지 내가 하려고 했어도 하지 못했을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철저하신 각본 아래 허락되어진 상황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그런 상황에 처하면 '하필 나에게 이런 재수없는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고 우울해하거나 자책을 하거나 어찌하든 그 상황을 벗어나보려고 온갖 궁리를 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는 내가 회개할 자리를 찾겠지. 하지만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볼 때 요셉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시작이지만 곳곳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역시 지금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창 37:29)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을 때, 르우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르우벤이 웅덩이로 돌아와 보니 요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은 너무나 슬퍼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창 37:30) 그후에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르우벤은 요셉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요셉의 형들의 작당모의의 방향을 트는 역할은 하였으나 정작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역할 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요셉 한 개인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집트를 향해,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더 큰 그림이 있으셨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도 예수님이 오실 그 때에 맞추어 세례 요한이 준비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고, 한나에게 아이가 없어 슬프고 괴로운 때를 보내야만 했던 것도 엘리 제사장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제사장인 사무엘이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후에 요셉의 고백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고(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요셉을 먼저 이집트 땅에 보내셨다'(창45:5, 7) 라고 알려주셨다. 

 

(창 45:5) 하지만 이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이 곳에 판 일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창 45:6) 벌써 이 년 동안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않고 있어요. 더구나 앞으로도 오 년 동안은 심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 45: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에요.
(창 45:8) 그러니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의 모든 일을 제가 맡고 있답니다. 저는 모든 이집트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의 개인적인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되면 자꾸 그것을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적으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꾸만 개인의 회개와 문제해결에만 기도의 방향이 맞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위에서 예를 들었던 스가랴와 엘리사벳, 한나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의 역사(성경을 통틀어 태초에서 말세까지 이르는) 안에서 '나'라는 인생을 쓰고 계시는지 알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하나님의 때는, 나의 개인적인 성공이나 성취와 같은 인간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재이자 주관자로서 철저한 계획 가운데 세상의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말씀하신대로(예언하신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즉 역사의 주체이시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내가 해야 되는 것은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역사 안으로 내 삶이 들어갈 수 있게, 하나님이 쓰실만한 거룩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꾸 내 삶에 들여와서 내가 원하는 결말을 이루어주시는 램프의 지니처럼 여기면 안된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야한다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려면 물론 인내가 필요하고, 절제가 필요하고, 연단의 시간을 거쳐야겠으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온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내가 할 것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리라. 

 

약1791년 쟝 쟈끄 포티 작. 피 묻은 아들의 옷을 보는 야곱. (출처 : 한국일보)

 

결국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은 염소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요셉이 입었던 소매가 긴 옷에 묻혀서 가지고 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고, 마치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고, 야곱은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엄청난 슬픔에 빠졌고, 요셉의 형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죄를 감추려 급급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고고히 흐르고 있었다. 

 

(창 37:36) 그러는 동안 요셉을 산 사람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서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보디발은 파라오의 신하였고, 왕궁 경호대의 대장이었습니다.

 

마치 요셉의 인생 시즌 1이 끝나고 시즌 2가 시작되는 듯하다. 요셉은 이 당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청천벽력과 같았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날 때, '내 인생의 시즌 1이 끝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시즌 2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갑자기 닥친 고난의 시기가 답답하고 힘들고 대체 이유를 모르겠고 언제 끝날지도 몰라서 막막하듯 요셉도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리라. 그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부족함 없이 잘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쫓겨나 세상 한복판에 내동댕이 쳐진 듯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파라오의 신하이자 왕궁 경호대의 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보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이다. 정신없는 고난이 요셉을 덮쳤지만 하나님은 하나씩 하나씩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고 계셨다는 것이다. 요셉으로서는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도 없고, 어렵고 힘든 날들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후에 창세기 39장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해주신다.

 

요셉의 형편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전혀 나아진게 없었다. 보디발의 집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었고, 나중에는 보디발의 아내의 술수에 말려, 오히려 죄 없는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 어렵고 더 힘든 일이 펼쳐지는데 왜 형통한거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것을 묵상할 때 성령님은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셨다.

 

이것이 왜 '형통한 것이냐면'!!!

하나님의 형통하심은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 바깥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상관없이 나만의 바벨탑을 쌓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사람 눈에 아무리 형통하더라도 절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형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셨고, 왕의 죄수들이 있는 감옥으로 보내셨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는 더욱 악화일로로 가는 듯한 모양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이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요셉이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쓰실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고후 4:17)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가벼운 환난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하고 한량없이 큰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이는 보이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꾸만 내가 주인되어 바라보는 나의 어리석음을 버리게 해주시고,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요동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세에 있으리라 하셨던 그 일이 예정된대로 일어나는 것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조각이 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게는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조각이 되기 위해 순종의 몸부림을 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시는 일을 절대 친구에게 감추지 아니하신다 하셨고,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신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다 드러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지키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시간을 버티고 인내하고 승리할 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때가 되매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하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깜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에 허락되어진다 하더라도, 나의 상황과 처지와 형편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은 선하시고, 언제나 옳으십니다! 이 진리를 놓지 않게 하옵소서! 이 진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스스로 만든 상처와 서운함의 감옥에서 내 영혼이 죽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귀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본체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진실로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나였기에 그냥 심판받아도 마땅할 인간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말도 안되는 엄청난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이미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자부심과 담대함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때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세상에서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오늘, 내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서 진리를 선택함으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게 하옵소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약속하신 성령님과 함께!!! 할렐루야!!!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게 된다(창33:18). 그리고 그는 그 곳에 장막을 쳤다. 

 

(창 33:18)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성 동쪽에 장막을 쳤습니다.
(창 33:19) 야곱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돈 백 개를 주고 샀습니다.
(창 33:20) 야곱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창34:1) 하몰의 아들이자 그 땅의 추장이었던 세겜의 눈에 띄어 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들이(특히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 세겜 성을 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했다. 야곱의 아들들로서는 누이가 강간을 당했기에 그렇게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일이었으나 야곱은 그 일을 통해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창 34:30) 그러자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이제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 우리는 수가 적다. 만약 그들이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면, 나와 우리 집안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창 34:31) 하지만 그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누이가 창녀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야곱으로서는 고생만 하던 밧단아람을 떠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잘 정착을 하나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고난에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임하셨다! 

 

(창 35: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엘 성으로 가서 그 곳에서 살아라.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그 곳에서 너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기본으로,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이전에 야곱에게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형 에서와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던 곳, 벧엘로 다시 가서 그 곳에서 살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하시는 것이다. 

 

(창 35:2) 야곱이 자기 가족과 자기와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우상들을 다 버려라. 너희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옷을 바꾸어 입어라.
(창 35:3) 여기를 떠나 벧엘로 가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나를 도와 주셨으며,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계셨다.”
(창 35:4) 이 말을 듣고 그들은 가지고 있던 이방 우상들을 다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성에서 가까운 큰 나무 아래에 파묻었습니다.
(창 35:5) 그런 다음에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큰 결심을 하였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우상들을 다 버려라. 너희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옷을 바꾸어 입어라." 정말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되는 장면이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이방인들의 땅인 세겜 성에 살면서 어느샌가 그들에게 틈탄 이방의 풍습들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닥친 고난의 이유가 결국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들을 섬기고 그 땅의 사람들처럼 그들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던 것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세상과의 충돌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될수록 세상과의 다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아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선택하였으므로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세겜 성에서의 모든 이방 풍습을 버리고, 즉 세상을 버리고! 벧엘로,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증거하였다. "여기를 떠나 벧엘로 가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나를 도와 주셨으며,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계셨다." 이 말을 듣고 야곱의 가족들은 이방 우상들을 다 내어놓고, 귀걸이도 내놓았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성에서 가까운 큰 나무 아래 파묻었다. 가정 안에서 영적으로 가장 깨어있는 한 사람(야곱)을 통해 이 가정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짓고 있었는지, 돌이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돌이킴(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정 안에서 한 사람의 깨어있음으로 결국 그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롬 12:1)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써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롬 12: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혼과 몸은 별개일 수가 없다. 영혼이 몸을 지배하게 해야지, 몸이 영혼을 지배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즉, 영혼의 일)을 따라 가는 것이기에 먼저 내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곧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순종하여 삶을 사는 것)에 집중할 때 그것이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임을 깨닫게 된다. 디나가 세겜 성의 여자들을 보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즉 세상을 본받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세상의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알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겠다고 결단하게 된다. 

 

세겜 성에서 가졌던 이방 우상들과 귀걸이를 땅에 파묻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세겜 성을 떠났는데, 근처에 있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쫓아오지 못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디나의 사건으로 아들들이 세겜 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제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야곱과 가족들을 원수로 여기고 공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그것을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자리를 돌이키고 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신 것이다. 야곱이 스스로, 자기들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대상들을 해결하러 나서지 않아도 야곱과 가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니 하나님께서 그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주신 것이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 10:26) “그러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덮였던 것은 모두 벗겨질 것이고, 감추어졌던 것은 다 알려질 것이다.
(마 10: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을 너희는 빛 가운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마 10:28)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라.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주여, 내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더욱 커지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자라나 세상을 탐하고 즐기고 싶은 순간마다 나의 모든 행위를 최후에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둠을 쫓아내려고 어둠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나아가 빛으로 나를 채우면 어둠은 저절로 떠나가게 되고,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여, 진리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무장되게 하사 순간 순간 나를 엄습하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절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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