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필요한 독서교육!


요즘에 서점을 가면 정말 아이들에게 읽힐만한 진리적이면서도 좋은 책이 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나누고 싶은 양서를 소개하고,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독서교육의 방법에 대해 앞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꾸려가는 독서교육! 제가 실제로 해보면서 좋았던 방법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2019년 

글쓰기를 다시, 새롭게 

시작!

TV 드라마와 영화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간혹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의한 컨텐츠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가뭄에 콩나듯 할 뿐 대개는 아주 아주 세상적이고 사람의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3:16)을 자극하는 컨텐츠일 뿐이지요. (이후의 이야기는 세상적인 컨텐츠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것을 지식적으로 알지만! 나의 눈과 마음은 드라마와 영화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도움이 안돼, 이걸 보는 건 시간낭비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용이 보고싶고, 궁금하고, '잠깐 보는 건데 이 정도 갖고 하나님이 크게 뭐라 하시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슬금슬금 TV나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몸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별로 알지 못하고, 그냥 세상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구별된 삶'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는 TV나 영화를 보는 것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고, 내 손과 발이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내가 TV를 켜고 내가 내 의지로 영화를 찾아서 보고 그러는 것인데도 말이에요~ ^^)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사실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악한 영이 유혹하기도 전에 내 마음에서 이미 세상 것을 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과 그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유혹해달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열린 자세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서~~ 왜? 아는데도 잘 안 되는 걸까? 세상 것들을 보고 들어봐야 기도할 때 방해되는 것만 많고, 주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밖에 안되는데, 왜 결심을 해도 잘 안 될까? 왜 난 여전히 그 드라마가 궁금하고, 그 스토리가 알고 싶고, 주인공이 어떻게 알콩달콩 사랑을 이루어갈지 보고싶은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세상 소식이 궁금하고, 그래서 포털의 뉴스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낼 때도 있고, 그렇게 뉴스 기사를 통해 드라마와 영화의 이야기를 접하다보면 그것을 또 찾아서 보고 싶기도 하고, 하나를 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닿는 한 몇 회를 왕창 봐야 속이 시원할 정도가 되는 이 마음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저의 마음을 토로하였을 때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2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내 영혼이 무엇으로 목말라 하는지를 알고 정말로 채워야 할 것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내 마음에 '심심하다, 외롭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라는 감정이 있었고, 이것을 채우려고 하다보니 무언가 보는 것, 듣는 것을 찾으려고 했고 그러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내 영혼의 그 비어있는 자리가 채워질 줄 알았습니다. 즉,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심심해지지 않을 것 같았고 외롭지 않을 것 같았고 재미있을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들 아시겠지만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나면 더 심심해지고 더 외롭고 나의 현실과 비교하면서 우울해지기도 합니다ㅎㅎㅎㅎ 왜냐하면 정말로 내 영혼의 빈자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세상적인 산물들로 채워질 수가 없거든요. 사람의 영혼은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정말로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어요.

 

영혼의 목마름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도 딱 하나입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하며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배 중에(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읽는 중에) 내 영혼이 하나님을 마주해야만!!! 그 헛헛하고 비어있었던 자리가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배 시간에 내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리는 더 이상 '심심하다, 외롭다, 새로운 것이 없을까'하는 육체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이미 더 고차원적인 채워짐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둘째는 '허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여 '현실의 세계=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가 철저히 '허상'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허상을 보고 난 다음에 그것을 현실에 가져와서 이야기하면서 마치 그것이 허상이 아닌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TV나 영화 앞에서 우리는, 몸을 그 앞에 갖다두고 나의 영혼을 고스란히 그 허상의 세계에 둡니다. 그 순간 나의 영혼은 허상의 세계에 빠져있고 내 육체는 현실의 세계에 멈춰있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실상은 '현실'인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내 영혼을 그 허상의 세계에 두고, 육체는 가만히 묶어두면 내가 정말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사실 후퇴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드라마나 영화를 볼 시간에 만약 내가 청소를 한다면 현실의 내 삶에서는 깨끗한 방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시간에 내가 설거지를 한다면 깨끗한 그릇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영혼과 육체를 허상의 세계에 묶어 두지 않고, 현실의 진짜 삶을 살면 내 삶에는 '진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만큼 허상의 세계는 '허상'입니다. 이 땅에서 나의 현실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내 영혼과 육체를 멍청하게 허상(거짓)에 묶어두는 사탄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게 그 실체를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1~2시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나라는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가는 그 시간 동안 허상의 세계에 내 영혼육의 닻을 내리고 도킹(docking)하고 있다니 이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인지!!! 깨달아야겠습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운동을 한다면 내 육체가 단련되는 생산적인 결과를 얻게 되겠지요~ ^^

 

주님과의 영적인 만남의 시간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주님과 함께 '현실'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요한일서 3: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디모데전서 4:7~8

7 하나님의 진리와는 다른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에 솔깃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일에 스스로를 훈련시키십시오.
8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생명도 약속해 줍니다.


photo by 김도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1.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2.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3.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 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4.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아멘♡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이....

내가 이루고 싶은 나의 꿈, 나의 소망으로 변질되어

 

사실은 나의 야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있게 하소서, 날마다 말씀으로 돌아보게 하소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5-17)

 

 

세상에 눈 돌렸던 나의 뒤통수를 강타했던 이 말씀을 잊지 말자!

새기고 또 새기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MMem 0433: Memorize key verses of Philippians


빌립보서 3장을 묵상하며...

사도 바울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열심이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다'(빌3:5)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러한 각성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하였고 누구라도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게 된다(요일2:15~16)고 하였던 그 말씀이 무엇인지 주님을 알아가면서 더욱 깨닫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사도 바울 못지않게 내가 속한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고 그런 열정도 있었다. 직장인으로 살아가는게 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무렵에 일했던 B사에서, 하나님은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보게 하셨다.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들이 많았고 이렇게 하면 돈을 벌겠다 싶은 일도 많았다. 내 마음은 어느새 돈을 벌어, 세상을 누리는데 달려갔고 주일성수까지 포기하며 회사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주님은 내 안의 육신의 정욕을 깨뜨리셨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E사에 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누구나 흠모할만한 직장이었고 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알아줄만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주님은 내 안에 '안목의 정욕'을 보게 하셨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소위 '있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 전문가라는 미명 아래 세상을 우습게 보며, 나의 지식과 경험이 잘난줄 알고 어찌하든 그런 지식과 경험을 채우는데 나의 열정을 다했다. 그러나 그 즈음의 특별새벽기도 기간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으로 인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지점과 내가 달려가고 있는 지점이 너무나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주님은 세상에서 우러러보이고 싶은 내 욕심을 깨뜨려주셨다.

그리고나서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이제는 정말 나라는 존재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심이 아닌 정말 선한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비영리단체 G에 들어갔다. 세상의 욕심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알았고, 그곳에서 내가 뭔가 해볼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서 처절하게 깨달은 것은, 사람이 사람을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의 노력으로 이 세상을 좋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될 수 있는 '인본주의'인지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내가 보기에 이래야 한다는 '자기 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를 통해 하나님은, 내 안에 이 땅에서 선하다 하는 일로 높아지려는 '이생의 자랑'이 산산히 부서지게 하셨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 구했었다. 정말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얻은 답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말이다.

지금 나는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사역자이자 하나님의 기업을 운영하는 대리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내 영혼은 기쁘다. 세상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평안함이 있다. 여전히 또다른 형태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싸우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분별하게 해주시는 성령과 진리가 내 안에 있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내가 가치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진리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내가 옳은 줄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정해졌고 진리는 날마다 나를 자유케한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말하였던 이것이 나의 고백이며, 이 믿음에서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구한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빌3:10~11).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

나는 과거의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립니다(빌3:13). 나는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 상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그리스도를 통해 친히 내리신 것입니다(빌3:14).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배가 원하는대로(육체의 욕망) 살아가며,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서도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세상 일에만 관심을 둡니다(빌3:19).

그러나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날을 나는 기다립니다(빌3:20)."

아멘!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 홀로 영광받으시옵소서!

 

<나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 나의 마지막도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디도가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한 이 은혜로운 일을 완수하라고

그를 권했습니다.(고후8:6)


이제는 하던 일을 마무리 하십시오.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마치는 것도 간절하게 하십시오.(고후8:11)

 

오늘 고린도후서 8장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주님께서 내게

은혜로 시작한 일을

끝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심이 있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때론 작게, 때론 거창하게...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완수하는 것,

즉 온전하게 마치는 것은

신실하신 주님처럼

신실하게 그 길을 가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나의 삶과 사역을 돌아볼 때,

어떤 것은 시작한 그 줄기를 붙들고

계속 이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시작은 은혜롭게 하였으되,

중간 과정에서 힘이 약해진 것들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실하신 주님은 나의 모든 고백과 헌신을 듣고 받으신다.  

신실하심 자체가 우리 주님의 성품이시기에,

주님은 내가 '하겠노라' 약속한 것들,

'하게 해주세요' 라고 구한 것들을 다 기억하시는데,

주님만큼 신실하지 못한 내가 늘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로부터 무언가 받으실 것을 기대하시며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무안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라고 하셨다.

 

주님이 시작하신대로 일단 시작했으니 다가 아니고,

시작해서 일단 가고 있는 중이니 다가 아니고,

가면서 일단 끝까지는 왔으니 다가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시작했으면

주님께 가는 모든 과정을 묻고 구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뜻하신 바를

온전히 이루어서 완수!하는 것,

그것이 다다.

 

주님은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신다.

그러하기에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 죄를 완전히 씻어주시고

완전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주님의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은

완전하신 주님을

내가 끝까지 온전하게 붙드는 것,

그것이면 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마11:29-30)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지고,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 배우면 된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지킬 수 없을 만큼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세상을 이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이길 수 있는 승리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일5:3-5)

 

날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 앞에 나아가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를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어떠한 세상의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리라!


 

사진출처:갓피플닷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고린도후서7:1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에(히4:12)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서 우리 육체는 찔러 쪼개어지는 아픔을 겪을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말씀이 나의 육체를 파하는 것이며,

그 때 내 영혼에는 진리로 인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돌파(breakthrough)'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영혼의 모난 부분을 빚어가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나를 회개케하여,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결코! 후회할 것이 없다.

 

내게 진리의 권면을 한 누군가에 대한 트집을 잡을 것도,

내 스스로가 어떤 면에서 억울하다고 주장할 것도,

주님은 왜 나를 이렇게까지 대하셔야 하냐고 원망할 것도 없이,

 

그것은 나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 즉 육체의 소욕을 채우지 못함으로 인해

나 자신을 연민하거나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나에 대해 자책하거나 혹은 상대방을 탓하거나

이러한 것들, 내 육체를 위로하고자 하는 슬픔은

결국에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6:23)인데,

내 영혼이 주님 앞에서

진리로 회개하여 돌이켜지고, 합당하게 빚어지기를 원하기보다

내 육체의 만족을 채우려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결국 '진리'보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진리로 육체의 돌파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서

'죽음'에 이르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진리의 말씀이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드러내게 하셔서,

내 안에 있는 죄의 추함과 더러움이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몸서리쳐지게 싫어질지라도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가 버려야 할 것(육체의 소욕=죄)과

내가 붙들어야 할 것(진리)을 깨닫게 하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2013년이 시작되고, 교회 전체적으로 매일 드리게 된 '새벽제단'이 어느새 17일이나 지났다.

 

처음 시작할 때도 1년 작정이므로, 괜히 멀리까지 생각해서 내가 과연 다 지킬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하루 하루를 승리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나를 돕는 자를 붙여주시고 오늘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늦지 않고

날마다 교회에서 새벽제단을 드리게 해주심에 감사드린다.

 

창세기부터 시작한 통독과 고린도전서 큐티 그리고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해주시는 것이 참 많은데,

그것을 기록해야지~ 하는 마음만 갖고 흘려보냈던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중요한 깨달음은 기록함으로써 나의 심령에 새기고 또한 그 말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흘려보냈으면 좋겠다.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드는 가장 큰 생각은,

바로 "말씀이 이끄는 삶"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은즉, 말씀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요1:3) 하셨던 것처럼,

나는 말씀으로 지어진 존재이고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내 몸의 재료가 원래 말씀이었고, 내 영은 원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존재였으나,

아담의 범죄함으로 영이 죽어 육체가 되었던 내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대속으로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이제 십자가에서 나의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었으므로,

나는 이제 말씀의 몸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로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늘 힘들고 어려웠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나를 진리로 이끌어 가신다!!! 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로는,

내가 주도해서 말씀대로 사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내 안에 있는 말씀으로 일하셔서, 나를 주님의 뜻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체험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진리를 알 때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하는 것(요8:32)이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얻게 되고, 말씀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된다(롬10:17, 쉬운성경)라고 하셨던 것처럼,

참으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은 내 안에서 자라게 된다.

내가 스스로 믿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내 안에서 커져서 그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주어지는 것이니, 결국에는 말씀이 나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The Words driven Life! 참으로 도전되고 소망되는 삶이다!

[본문] 에스겔 27:26-36 / 아가페의 쉬운큐티 “두로의 멸망에 대한 주변 나라들의 탄식”

 

[여는 이야기] 두로는 자신의 부를 의지하며 해상 무역을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집중시켰으나, 하나님은 두로를 심판하여 갑작스럽게 망하게 하실 것이다. 이에 두로와 무역하던 나라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또한 두로의 멸망을 조롱하며 기뻐할 것이다. (쉬운큐티)

 

26 너의 노를 젓는 사람들이 너를 깊은 바다로 데리고 나가지만 동풍이 불어와 바다 한가운데서 너를 산산조각낼 것이다.
27 너의 재산과 물품들과 상품들, 네 뱃사람들과 사공들, 그리고 배 일꾼들, 네 상인들과 너의 모든 군인들, 그리고 배에 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바다 한가운데에 빠지게 될 것이다. 네 배가 좌초하는 날에 그렇게 될 것이다.
28 네 뱃사람들이 울부짖을 때, 해변가의 사람들이 무서워 떨 것이다.
29 노를 젓는 모든 사람들이 배를 버리고 선원들과 모든 뱃사람들이 바닷가에 서서,
30 목소리를 높여 너를 향해 크게 울부짖을 것이다. 그들은 티끌을 자기 머리 위에 뿌리며 재 속에서 뒹굴 것이다.
31 너로 인하여 그들은 머리를 밀며 베옷을 입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크나큰 소리로 슬피 울 것이다.
32 그들이 너를 향해 통곡하며, 너를 위해 애도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누가 두로처럼 침묵한 적이 있고 바다에 둘러싸인 적이 있었는가?
33 네 상품들이 바다로 팔려 나갔을 때, 너는 많은 나라들을 만족시켰다. 너의 커다란 재물과 너의 물품들로 너는 땅의 왕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34 그런데 이제 너는 바다에 빠져 산산조각났고, 깊은 바다에 잠기니, 너의 물품들과 너의 모든 동행자들이 너와 함께 깊은 바다에 빠졌다.
35 바닷가에 사는 모든 자들이 너를 보고 크게 놀라고 그들의 왕들도 몸서리를 치며, 그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36 모든 나라의 상인들이 너를 비웃으니, 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이제 끝장나 버렸다.’”

(쉬운성경, 에스겔 27:26-36)

 

[묵상과 적용]


1.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26-27절)

 

두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요 활동지는 바다였다. 26절의 '너의 노를 젓는 사람들'은 두로의 국가로서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던 사람들로서, 그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많은 부를 얻을 것을 기대함으로 깊은 바다로 나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어느 날, 동풍이 불어와 그들이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바다 한가운데서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될 것을 예언하신다.

 

27절의 너의 재산과 물품들과 상품들, 네 뱃사람들과 사공들 그리고 배 일꾼들, 네 상인들과 너의 모든 군인들, 그리고 배에 탄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곧 두로가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다. 두로는 언제나 해상 무역으로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드나들며,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멸망’이라는 것은 참으로 먼 얘기와 같았을 것이다. 두로는 매우 많은 것을 소유하였지만 두로가 믿었던 바다 한가운데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소유는 결코 그를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좌초되듯 두로라는 국가가 무너질 때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도 함께 바다에 빠져버리게 되어, 두로가 의지했던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한 국가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도, 나라를 폐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 앞에서는 결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로, 즉 고대국가 ‘페니키아’로 알려진 그 나라는 한 시대를 풍미하며 경제적, 문화적인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망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부강했던 두로였기 때문에 두로의 멸망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망할 것 같지 않던 국가도 이처럼 스러져 멸망할 수 있다면 일개 개인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말씀해주신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많은 재산을 쌓아두고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겠노라(눅12:19) 계획한다고 할지라도 당장 오늘 밤 주님이 그 영혼을 가져가신다면 그가 준비한 것을 누가 가져가겠는가?(눅12:20)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것(눅12:21)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갖 욕심을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거기에 달려 있지 않으니(눅12:5),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내 마음에도 이 땅의 것을 욕심냈던 것이 있다면 다시금 그 마음을 추스려야겠다.

 


2. 왕과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28-32절)

 

갑작스럽게 두로에 멸망의 날이 닥쳤을 때, 두로라는 배를 이끌던 뱃사람들, 즉 두로의 지도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두로의 멸망을 보고 해변가의 사람들 역시 무서워 떨게 될 것이다. 노를 젓는 모든 사람들이 배를 버리듯, 두로의 지도자들이 망해가는 두로를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고, 두로의 백성들은 바닷가에 서서 목소리를 높여 나라의 멸망을 애통해 할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사람들이 큰 슬픔을 표현했던 방법처럼 머리를 밀며 베옷을 입을 것이고, 나라의 멸망을 경험하는 고통 속에서 크나큰 소리로 슬피 울게 될 것이다. 두로 백성들은 망해가는 나라를 향해 통곡하며 두로를 위한 애도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슬퍼하며 부르짖어도 두로는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계속 침묵하며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로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망하고 나의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말 할 수 없이 당황스럽고 힘겨운 상황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속한 국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시절에, 나라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어느 누구 할 것이 없이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이라면, 본인이 속한 국가인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중에는 자신도 그 지배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아무리 한 개인이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이 여긴다 하더라도 그가 속한 국가의 지배 체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속한 나라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유지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왕과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딤전2:2).

 

우리나라가 지금은 평안해 보이더라도 우리와 대치상태에 있는 북한이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나라의 국민은 어느 누구라도 그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한민국에 태어나게 하시고, 대한민국에 살게 하신 이상, 나는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 손에 붙들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로의 백성들이 국가의 멸망 앞에서 애통해하고 부르짖어도 이미 하나님께 멸망의 심판을 받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아직 평안한 중에 있을 때 더욱 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

 


3.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라. (33-36절)

 

33절 말씀처럼 두로의 상품들이 바다로 팔려 나가며 여러 나라에 공급되었을 때, 두로는 많은 나라들을 만족시켰다. 두로의 커다란 재물과 물품들은 땅의 왕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로의 부강함은 이 땅의 것들을 만족시킬 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는, 썩어지고야 말 이 땅의 것들을 만족시키는데 두로의 모든 힘과 능력이 쓰였던 것이다.

 

두로가 아무리 자기가 가진 소유물들로 주변 국가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는 두로의 도움을 받았던 주변 국가들의 힘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로의 물품들이 바다에 빠질 때, 즉 그들의 소유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빌로니아에 의해 깨어지고 부수어질 때, 그와 함께 했던 동행자들 즉 두로의 부강함을 통해 함께 유익을 얻었던 자들도 함께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5절은 바닷가에 사는 모든 자들, 즉 두로로 인해 부유함을 함께 누렸던 주변 국가들이 두로의 멸망을 보고 함께 놀라게 되고, 그 주변 국가의 왕들도 부강하던 두로가 어떻게 이렇게 하루 아침에 망할 수 있게 되는지 몸서리를 치며 그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로가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며 주변 국가들에게 물건을 공급하고 그들에게 만족을 주었건만, 두로가 멸망하는 그 때에는 모든 나라의 상인들이 결국에는 두로를 비웃게 된다는 것(36절)이다. 두로가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좋은 물품의 공급처이자 재물의 통로로 위세 등등하게 지내왔지만 하나님께서 두로를 멸망시킬 때에는 그들이 과거에 자랑했던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으니 두로는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이 땅에 존재했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로와 주변 국가의 관계를 보면, 사람이 아무리 주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자기의 의롭다 여겨지는 행위로 만족함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 어떠한 인간관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로는 주변 국가들에게는 모든 필요의 공급처였으며 두로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그 부요함을 함께 누렸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그 주변 국가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도리어 그들은 두로의 멸망을 비웃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로가 결국 자기를 높여주고, 자기에게 유익을 줄 것 같은 주변 국가들, 즉 땅의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왔던 것을 보면서, 지금 나의 삶은 무엇을 만족시키며 누구를 만족시키는 것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골3:1).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하는데, 잠시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하늘의 것보다 땅의 것이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함을 느낀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주님’이라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대로 살기를 바란다. 어느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함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위함도 아닌, 내 영혼의 생명이 오직 주님께 있으니 나의 삶은 주님을 위한 삶,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삶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나의 삶이 이 땅에서의 관계를 만족시키고, 또한 이 땅의 것으로 내 스스로도 만족하는 삶이 아닌, 오직 주님을 만족시키고 주님으로 인해 부요한 삶이기를, 그것이 정말로 내 심령에 새겨지고 내 뼛속에 새겨지기를 주님께 간구한다.

 


[오늘의 기도]

자신의 부요함을 믿고 자만했던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내 심령 깊은 곳에서도 나의 어떠함을 믿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으로 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썩어질 것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귀함을 더욱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의 것에 마음을 줄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보화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결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것을 만족시키고 이 땅의 것으로 만족했던 두로의 멸망을 교훈삼아 날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모든 중심이 주님을 향하도록 날마다 저를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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