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7:5-8, 쉬운성경]
5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들려주자, 형들은 요셉을 더 미워했습니다.
6 요셉이 말했습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7 우리가 들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내 곡식단이 일어서니까, 형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 곁으로 몰려들더니 내 곡식단 앞에 절을 했어요."
8 요셉의 형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줄 아느냐? 네가 정말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줄 아느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한 꿈 이야기 때문에 그전보다도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이 이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의 형들은 코웃음을 치며 요셉을 미워했었다.


[창37:9-11, 쉬운성경]
9 그후에 요셉이 또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또 형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들어 보세요. 내가 또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보니까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10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도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아버지는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꿈이냐? 너는 정말로 너의 어머니와 너의 형들과 내가 너에게 절을 할 것이라고 믿느냐?"
1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

그 후에 요셉은 또 한 번 비슷한 꿈을 꾸었다. 그들의 현실에서 볼 때는 너무나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일이라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고,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꾸짖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오늘 정독의 본문에서 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장면이 나왔다.

[창42:6, 쉬운성경] 그 때,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였습니다.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에게 왔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땅에 엎드려 요셉에게 절했습니다.

[창43:28, 쉬운성경] 요셉의 형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종인 우리 아버지는 안녕하십니다. 그분은 아직 살아 계십니다." 대답을 마친 후에 그들은 요셉 앞에서 머리를 숙여 다시 절했습니다.





물론 요셉이 꾼 꿈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 가운데 주신 예언적 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볼수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분이신데, 내가 얼마나 이것을 진실로, 진실로 믿고 기도하고 있었는가 오늘은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한 세월이 얼만데.... 난 분명히 하나님을 믿지! 성경 말씀도 사실이지!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고 기도할 때 내적인 음성으로 주신 것들을 내가 정말 믿는다면 그 말씀들을 절대 흘려듣지 않고, 더 새기고, 더 붙들고, 이루어질 그날이 오기까지 더 믿음으로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의 믿음은 가끔, 믿는다 하면서도 그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는.... 즉, 믿는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은 믿고 있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날이다. 말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못 믿기 때문에 불안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내 나름의 방편을 찾으려 머리를 굴린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일까?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도 막연하게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 내용을 더욱 새기고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다.

야곱이 요셉을 혼내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듯이, 신약성경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에 관한 일들에 대해 마음에 새겼던 것이 기억난다.

[눅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눅2:19, 쉬운성경]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였습니다.

[눅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2:51, 쉬운성경]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진실로 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더욱 진중하고 신실한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기고, 기억하고, 꼭 붙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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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으신 주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혼내지 않으시고 매일의 말씀 묵상을 통해 부드럽게 터치해주시는 좋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은혜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새기지 못하고 대강 듣고 흘렸던 순간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하나님을 더욱 꼭 붙들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매일 묵상을 기록하게 해주심도 저에게 듣고, 새기라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인줄을 이제 알겠사오니 더욱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믿고 인내하게 하옵소서! 참으로 좋으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의 본문은 창세기 39~41장이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성령님께서 내게 주목하게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오는 복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너무나 잘 알듯이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표면적으로는 그러하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이스마엘 사람들 손에 넘겨져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이끌어가고 계셨음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왕궁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다가 나중에는 억울한 사건에 말려 왕의 죄수들을 넣는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였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실제는 노예요 죄수였음에도 그가 맡은 일은 신분과는 상관없이 관리급이었으며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해 요셉이 있는 곳에 복을 부어주셨다. 그러다가 그는 이집트 왕의 꿈을 풀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여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아래 있었다. 

 

 

(창 41:16) 요셉이 파라오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꿈을 해몽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위해 해몽해 주실 것입니다.”

(창 41:25) 그 때에 요셉이 파라오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꿈의 뜻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파라오께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창 41:32) 파라오께서는 뜻이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꾸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기로 굳게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곧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으로 꾸게 하셨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파라오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었기에, 하나님은 파라오가 꿈 해몽을 듣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따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창 41:36) 나중을 위해 그 식물을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그 식물은 이집트 땅에 닥쳐올 칠 년 동안의 가뭄 때 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칠 년 동안 가뭄이 들어도 이집트 백성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창 41:56) 어디를 가도 가뭄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창고를 열어서 이집트 백성들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 땅에도 가뭄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창 41:57) 모든 땅의 백성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의 요셉에게 왔습니다. 온 세계에 심한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세말까지 모든 일을 이미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요셉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계획 안에서 이집트에게 부강한 시절을 일정 기간 동안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것을 알려주시며 대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셨다. 그리고 파라오는 요셉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들였고,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기에, 온 세계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요셉의 창고를 열어 사람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작정하신대로 이루지만, 그 안에서도 피난처되시는 주님을 따르고 구하는 자에게는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데, 다만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이다. 

 

이 부분을 묵상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바로 요한계시록 1:1~3 말씀이다. 

(계 1: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기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 이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어 이 일을 알게 하셨습니다.
(계 1:2)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 1:3)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것을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 역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요셉을 통해 온 세계에 7년 동안의 풍년 이후 7년 동안의 흉년의 시기가 있을 것을 알려주시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피할 길'을 내어주셨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도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 알려주셨고, 순종하기만 하면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지킴받고 보호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이미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계 22:10) 그리고 천사는 내게 지시하였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비밀로 하지 마라.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가 멀지 않았다.
(계 22:11)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계속 악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더러운 그대로 놔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계속 의롭게 살도록 하며, 거룩한 사람들은 계속 거룩하도록 하여라.”
(계 22:12) “보아라! 내가 속히 가겠다! 내가 상을 가지고 가서, 너희가 행한 대로 갚아 주며 상을 베풀 것이다.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계 22:14) 자기 옷을 빠는 자는 복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며, 성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계 22:15) 악하고, 마술을 행하며, 음란하고, 살인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거짓말을 즐겨하던 자들은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계 22:16) 나 예수는 온 교회에 이 모든 것을 증언하기 위해 천사를 보냈다. 나는 다윗의 자손이며 빛나는 새벽별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모든 일을 이미 작정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결코 숨기지 않고 다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내가 할 것은 진실로 성경의 말씀, 특히 오늘 레마로 주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믿고 계속 의롭게, 거룩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주님, 주님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결코 숨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알만한 것들로 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기웃거린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정말로 내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숨기지 않으시고 성경을 통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채워서, 말세에 있으리라 하셨던 그대로, 이 세상이 망하는 중에도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주님만을 따라가며 피난처 되시는 주님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눅 21:33)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눅 21:34) “네 마음이 방탕과 술취함과 삶의 걱정으로 무겁게 눌리지 않도록 하여라. 그 날이 마치 덫처럼 갑자기 네게 다가올 것이다.
(눅 21:35) 그 날은 온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올 것이다.
(눅 21:36)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피할 힘을 얻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라.”

그 날은 온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피할 힘을 얻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신 이 말씀을 더욱 주의깊게 새기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되어 내 영혼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내가 중보하는 영혼들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함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특별히 창세기 37장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37장에는 야곱의 가족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당시 17살이었던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은 야곱이 늙어서 얻은 아들이었고, 게다가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에서 얻은 아들이었기에 그를 너무 귀하게 여긴 나머지 다른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창 37:3) 요셉은 야곱이라고도 부르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늙어서 낳은 아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어느 아들보다도 요셉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소매가 긴 좋은 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창 37:4)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꿈을 꾸었다. 하나님의 때는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이다.  

 

(창 37:6) 요셉이 말했습니다.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창 37:7) 우리가 들에서 곡식단을 묶고 있는데, 내 곡식단이 일어서니까, 형들의 곡식단이 내 곡식단 곁으로 몰려들더니 내 곡식단 앞에 절을 했어요.”
(창 37:8) 요셉의 형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라도 될 줄 아느냐? 네가 정말로 우리를 다스리게 될 줄 아느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말한 꿈 이야기 때문에 그전보다도 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은 본인의 의도와 달리, 그저 그가 꾼 꿈을 말했을 뿐인데 형들에게 더 큰 미움을 샀다. 

 

(창 37:9) 그후에 요셉이 또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또 형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들어 보세요. 내가 또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보니까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했어요.”
(창 37:10) 요셉은 그 꿈 이야기를 자기 아버지에게도 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아버지는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꿈이냐? 너는 정말로 너의 어머니와 너의 형들과 내가 너에게 절을 할 것이라고 믿느냐?”
(창 37:11)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꿈을 또 한번 꾸었다. 그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더욱 질투했고,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그 내용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다. 

 

(창 37:12)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를 치려고 세겜으로 갔습니다.
(창 37: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 떼를 치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려 한다.” 요셉은 “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창 37:14) 요셉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 보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다오.” 요셉의 아버지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요셉을 떠나 보냈습니다. 요셉이 세겜에 이르렀습니다.

 

또 다시 '어느 날'이 임하였다. 아주 평범했던 어느 날, 평소와 다르게 특별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 날이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그러나 제3자적 시각으로 요셉의 이 어느 날을 바라볼 때,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 날이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는 눈이 비로소 열리는 것 같다.

 

(창 37:18) 요셉의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가까이 오기 전에 요셉을 죽이기로 계획하고
(창 37:19)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꾸는 애가 오는구나.
(창 37:20) 저 애를 죽여서 그 시체를 웅덩이에 던져 넣자.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이 저 아이를 죽였다고 말하자.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두고 보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꿈꾸는 애'를 죽여보자고, 그러면 그가 꾼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고 작당모의를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고, 하나님은 이미 요셉에게 주신 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계획이 있으셨기에, 일정 부분은 형들의 악함을 사용하셨으나 그게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게 막으셨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 잠언 16:4)

 

(창 37:21) 하지만 그 때, 르우벤이 그 계획을 듣고 요셉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 말했습니다. “요셉을 죽이지는 말자.
(창 37:22)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말자. 이 광야의 웅덩이에 저 아이를 던져 넣자. 하지만 해치지는 말자.” 르우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요셉을 그 형들의 손에서 구해 내어 아버지께 돌려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맏형 르우벤의 마음에 요셉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르우벤의 발언으로 이들의 작당모의의 방향은 약간 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르우벤의 생각처럼 진행되지도 않는다.)


(창 37:23) 요셉이 형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형들은 소매가 긴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창 37:24) 그리고 그들은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웅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의 한 수가 있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르우벤이 요셉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말고 광야의 웅덩이에 던져 넣자고 하자, 형들은 계획을 바꾸어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넣었는데! 그 웅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 요셉이 해를 입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이 마른 웅덩이를 그 자리에 예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우리를 고난과 연단의 과정으로 몰아가신다 하더라도 정말 피할 길을 내어주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까지는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된다. 

 

(창 37:25) 요셉이 웅덩이에 있는 동안 형들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스마엘 사람들은 낙타에 향료와 유향과 몰약을 싣고 길르앗에서 이집트로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창 37:26) 그 모습을 보고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인 다음, 그 사실을 숨긴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나?
(창 37:27) 차라리 요셉을 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버리자. 그러면 동생을 죽이는 죄도 짓지 않게 된다. 그래도 저 애는 우리 동생이고, 우리와 피와 살을 나눈 형제가 아니냐?” 그러자 다른 형들도 모두 유다의 말에 찬성했습니다.
(창 37:28) 그러는 동안,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갈 때에 형들은 요셉을 웅덩이에서 꺼내어, 은 이십 세겔 을 받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곤경에 처하게 한 후,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때마침!!! 이스마엘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기가 막힌 연출의 타이밍이 아니었을까?!!! 그 이스마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유다가 나서서 '요셉을 죽일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서 동생을 죽이는 죄를 피하자'고 하였고, 다른 형들도 유다의 말에 찬성했다. 그래서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서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요셉 스스로는 평생 이집트에 가게 될 일이 있었을까 싶은 이 때에,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로 한 순간에 헤브론 골짜기에 있던 요셉은 이집트로 가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다. 늘 똑같을 것 같은 일상이 무너지고, 갑자기 내 인생의 무대가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병원이 되기도 하고,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고, 이민을 가게 되기도 하고, 이직을 하게 되기도 하고, 감옥에 가게 되기도 하고, 부도가 나기도 하고....하지만 이것도 정말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싶은 상황이라면? 이건 도무지 내가 하려고 했어도 하지 못했을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철저하신 각본 아래 허락되어진 상황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야 그런 상황에 처하면 '하필 나에게 이런 재수없는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고 우울해하거나 자책을 하거나 어찌하든 그 상황을 벗어나보려고 온갖 궁리를 하게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는 내가 회개할 자리를 찾겠지. 하지만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볼 때 요셉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시작이지만 곳곳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역시 지금 이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창 37:29)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을 때, 르우벤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르우벤이 웅덩이로 돌아와 보니 요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은 너무나 슬퍼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창 37:30) 그후에 르우벤은 다른 형제들에게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르우벤은 요셉을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요셉의 형들의 작당모의의 방향을 트는 역할은 하였으나 정작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기는 순간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역할 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는 요셉 한 개인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집트를 향해,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더 큰 그림이 있으셨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도 예수님이 오실 그 때에 맞추어 세례 요한이 준비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고, 한나에게 아이가 없어 슬프고 괴로운 때를 보내야만 했던 것도 엘리 제사장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제사장인 사무엘이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후에 요셉의 고백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고(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요셉을 먼저 이집트 땅에 보내셨다'(창45:5, 7) 라고 알려주셨다. 

 

(창 45:5) 하지만 이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이 곳에 판 일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창 45:6) 벌써 이 년 동안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않고 있어요. 더구나 앞으로도 오 년 동안은 심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 45: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에요.
(창 45:8) 그러니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의 모든 일을 제가 맡고 있답니다. 저는 모든 이집트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의 개인적인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되면 자꾸 그것을 개인적으로 해석하고 개인적으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꾸만 개인의 회개와 문제해결에만 기도의 방향이 맞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위에서 예를 들었던 스가랴와 엘리사벳, 한나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의 역사(성경을 통틀어 태초에서 말세까지 이르는) 안에서 '나'라는 인생을 쓰고 계시는지 알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하나님의 때는, 나의 개인적인 성공이나 성취와 같은 인간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재이자 주관자로서 철저한 계획 가운데 세상의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말씀하신대로(예언하신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즉 역사의 주체이시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내가 해야 되는 것은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역사 안으로 내 삶이 들어갈 수 있게, 하나님이 쓰실만한 거룩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꾸 내 삶에 들여와서 내가 원하는 결말을 이루어주시는 램프의 지니처럼 여기면 안된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야한다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려면 물론 인내가 필요하고, 절제가 필요하고, 연단의 시간을 거쳐야겠으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온다. 그 날이 이르기까지 내가 할 것은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리라. 

 

약1791년 쟝 쟈끄 포티 작. 피 묻은 아들의 옷을 보는 야곱. (출처 : 한국일보)

 

결국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은 염소 한 마리를 죽여서 그 피를 요셉이 입었던 소매가 긴 옷에 묻혀서 가지고 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보여주고, 마치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고, 야곱은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엄청난 슬픔에 빠졌고, 요셉의 형들은 어느 날 갑자기 죄를 감추려 급급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고고히 흐르고 있었다. 

 

(창 37:36) 그러는 동안 요셉을 산 사람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서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보디발은 파라오의 신하였고, 왕궁 경호대의 대장이었습니다.

 

마치 요셉의 인생 시즌 1이 끝나고 시즌 2가 시작되는 듯하다. 요셉은 이 당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청천벽력과 같았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삶에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날 때, '내 인생의 시즌 1이 끝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시즌 2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갑자기 닥친 고난의 시기가 답답하고 힘들고 대체 이유를 모르겠고 언제 끝날지도 몰라서 막막하듯 요셉도 그 당시에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리라. 그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부족함 없이 잘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쫓겨나 세상 한복판에 내동댕이 쳐진 듯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파라오의 신하이자 왕궁 경호대의 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보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반전이다. 정신없는 고난이 요셉을 덮쳤지만 하나님은 하나씩 하나씩 그분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고 계셨다는 것이다. 요셉으로서는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도 없고, 어렵고 힘든 날들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후에 창세기 39장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해주신다.

 

요셉의 형편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전혀 나아진게 없었다. 보디발의 집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었고, 나중에는 보디발의 아내의 술수에 말려, 오히려 죄 없는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요셉이 형통하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 어렵고 더 힘든 일이 펼쳐지는데 왜 형통한거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이것을 묵상할 때 성령님은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셨다.

 

이것이 왜 '형통한 것이냐면'!!!

하나님의 형통하심은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 바깥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상관없이 나만의 바벨탑을 쌓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사람 눈에 아무리 형통하더라도 절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형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보내셨고, 왕의 죄수들이 있는 감옥으로 보내셨다. 비록 사람의 눈으로는 더욱 악화일로로 가는 듯한 모양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이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요셉이 하나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쓰실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고후 4:17)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가벼운 환난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하고 한량없이 큰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이는 보이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꾸만 내가 주인되어 바라보는 나의 어리석음을 버리게 해주시고,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공간과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요동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세에 있으리라 하셨던 그 일이 예정된대로 일어나는 것 뿐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조각이 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게는 미움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조각이 되기 위해 순종의 몸부림을 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하고 계시는 일을 절대 친구에게 감추지 아니하신다 하셨고, 지금은 구약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신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다 드러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지키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이 시간을 버티고 인내하고 승리할 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때가 되매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하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깜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에 허락되어진다 하더라도, 나의 상황과 처지와 형편과 상관없이 언제나 하나님은 선하시고, 언제나 옳으십니다! 이 진리를 놓지 않게 하옵소서! 이 진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스스로 만든 상처와 서운함의 감옥에서 내 영혼이 죽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귀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본체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진실로 벌레만도 못한 나를 위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나였기에 그냥 심판받아도 마땅할 인간인 나를, 하나님께서는 말도 안되는 엄청난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이미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자부심과 담대함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때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세상에서의 인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오늘, 내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서 진리를 선택함으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게 하옵소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약속하신 성령님과 함께!!! 할렐루야!!!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게 된다(창33:18). 그리고 그는 그 곳에 장막을 쳤다. 

 

(창 33:18)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 세겜 성에 무사히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성 동쪽에 장막을 쳤습니다.
(창 33:19) 야곱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돈 백 개를 주고 샀습니다.
(창 33:20) 야곱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창34:1) 하몰의 아들이자 그 땅의 추장이었던 세겜의 눈에 띄어 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의 아들들이(특히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 세겜 성을 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했다. 야곱의 아들들로서는 누이가 강간을 당했기에 그렇게 복수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일이었으나 야곱은 그 일을 통해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창 34:30) 그러자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이제는 이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것이다. 우리는 수가 적다. 만약 그들이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면, 나와 우리 집안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창 34:31) 하지만 그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누이가 창녀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야곱으로서는 고생만 하던 밧단아람을 떠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잘 정착을 하나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고난에 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임하셨다! 

 

(창 35: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벧엘 성으로 가서 그 곳에서 살아라.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칠 때, 그 곳에서 너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기본으로, 본질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이전에 야곱에게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형 에서와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던 곳, 벧엘로 다시 가서 그 곳에서 살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하시는 것이다. 

 

(창 35:2) 야곱이 자기 가족과 자기와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우상들을 다 버려라. 너희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옷을 바꾸어 입어라.
(창 35:3) 여기를 떠나 벧엘로 가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나를 도와 주셨으며,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계셨다.”
(창 35:4) 이 말을 듣고 그들은 가지고 있던 이방 우상들을 다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귀에 걸고 있던 귀걸이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성에서 가까운 큰 나무 아래에 파묻었습니다.
(창 35:5) 그런 다음에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큰 결심을 하였다.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우상들을 다 버려라. 너희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옷을 바꾸어 입어라." 정말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되는 장면이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이방인들의 땅인 세겜 성에 살면서 어느샌가 그들에게 틈탄 이방의 풍습들을 버리라'고 명령한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닥친 고난의 이유가 결국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이방 우상들을 섬기고 그 땅의 사람들처럼 그들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던 것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세상과의 충돌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될수록 세상과의 다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아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이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선택하였으므로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세겜 성에서의 모든 이방 풍습을 버리고, 즉 세상을 버리고! 벧엘로,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증거하였다. "여기를 떠나 벧엘로 가자.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는 내가 괴로움을 당할 때에 나를 도와 주셨으며,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계셨다." 이 말을 듣고 야곱의 가족들은 이방 우상들을 다 내어놓고, 귀걸이도 내놓았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성에서 가까운 큰 나무 아래 파묻었다. 가정 안에서 영적으로 가장 깨어있는 한 사람(야곱)을 통해 이 가정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짓고 있었는지, 돌이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돌이킴(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가정 안에서 한 사람의 깨어있음으로 결국 그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롬 12:1)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자비로써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
(롬 12: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혼과 몸은 별개일 수가 없다. 영혼이 몸을 지배하게 해야지, 몸이 영혼을 지배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우리가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나의 마음과 생각(즉, 영혼의 일)을 따라 가는 것이기에 먼저 내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곧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순종하여 삶을 사는 것)에 집중할 때 그것이 곧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임을 깨닫게 된다. 디나가 세겜 성의 여자들을 보러 나가지 않았더라면, 즉 세상을 본받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세상의 것들에 호기심을 갖고, 알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겠다고 결단하게 된다. 

 

세겜 성에서 가졌던 이방 우상들과 귀걸이를 땅에 파묻고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세겜 성을 떠났는데, 근처에 있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쫓아오지 못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디나의 사건으로 아들들이 세겜 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제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야곱과 가족들을 원수로 여기고 공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그것을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킬 자리를 돌이키고 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신 것이다. 야곱이 스스로, 자기들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대상들을 해결하러 나서지 않아도 야곱과 가족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니 하나님께서 그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주신 것이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 10:26) “그러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덮였던 것은 모두 벗겨질 것이고, 감추어졌던 것은 다 알려질 것이다.
(마 10:27)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을 너희는 빛 가운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마 10:28)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 마라. 영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주여, 내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더욱 커지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자라나 세상을 탐하고 즐기고 싶은 순간마다 나의 모든 행위를 최후에 심판하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세상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둠을 쫓아내려고 어둠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나아가 빛으로 나를 채우면 어둠은 저절로 떠나가게 되고, 진정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여, 진리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무장되게 하사 순간 순간 나를 엄습하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절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의 본문은 창세기 31~33장 말씀인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해보고자 한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이 맏아들 에서인 것처럼 속여 맏아들의 축복을 받은 후,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 부모의 말을 따라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20여년을 머물며 많은 연단 끝에 외삼촌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들의 몸종 빌하와 실바까지 더하여 총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네 조상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창31:3)라는 말씀을 듣고 온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사는 자기 아버지 이삭을 향해 떠났다(창31:18).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형 에서였다. 20년 전에도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데,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는 이 때에 다시 형을 만난들 형이 자신을 무사히 둘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는 에서를 만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야곱의 인생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형 에서가 자신을 용서해주어야 해결될 문제였기에) 그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창 32:9) 야곱이 말했습니다.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네 나라,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네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32:10)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온갖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처음 요단 강을 건넜을 때, 저에게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재산을 둘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창 32:11) 제발 저를 제 형 에서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에서가 와서 저와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이들까지 해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32:12)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겠다. 내가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은 정확히 자신이 찾는 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냥 막연한 이방 우상이 아니라 본인이 벧엘에서 만났던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붙들고 간절하게 간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후에 그는 어떤 사람(하나님)과 씨름하게 되었고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이 부분을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것을 우리는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말씀) 안에 있고, 말씀(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하셨고, 의심없이 믿을 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막 11:23)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하여 ‘뽑혀서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속에 아무 의심 없이 말한 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자!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며 기도하자! 그럴 때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못하실 것이다^^

 

(창 32:22) 그 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습니다.
(창 32:23) 야곱은 자기의 가족 모두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창 32:24) 그리고 자신은 홀로 뒤에 남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
(창 32:25)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엉덩이뼈를 어긋나게 만들었습니다.
(창 32:26)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지만 야곱이 말했습니다. “저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창 32:27)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야곱입니다.”
(창 32:28)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고, 사람과도 씨름을 해서 이겼기 때문이다.”
(창 32:29) 야곱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며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창 32:30) 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
(창 32:31) 야곱이 그 곳을 떠나려 할 때에 해가 떠올랐습니다. 야곱은 엉덩이 때문에 다리를 절뚝거렸습니다.
(창 32:32) 브니엘에서 나타난 사람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이뼈에 붙어 있는 큰 힘줄을 먹지 않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에서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했던 그 날 밤, 어떤 사람이 와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다. 성경은 그가 사실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곱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는지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저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보내 드릴 수 없다"고 끝까지 매달린다. 이처럼 야곱이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만큼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이야말로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고, 사람과도 씨름을 해서 이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이 죽고, 성령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연상된다.

 

야곱은 도무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 자체가 먼저 변화되게 해주셨고, 야곱 역시 더 이상 문제 해결에 매몰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애 3: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 인생 가운데 고생과 근심케 할 일들을 허락하신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회개할 것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인 것이다. 

 

야곱은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옛사람(야곱)은 죽었고 그의 영혼은 새 사람(이스라엘)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그 날, 나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진 이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었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결국 '나'라는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것을 알고 인정하고 진실로 믿는다면 끝까지, 기도의 응답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였은즉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는 간절함과 끈질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야곱처럼! 말이다. 

 


 

주여, 인간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의 이토록 연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람을 용서해주시고 고난이 있어야만 주를 찾는 어리석음이 없게 하옵소서! 평안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으로 충천하게 하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마음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주의 종이 될 수 있도록 변화되게 하옵소서, 성숙해지게 하옵소서! 

 

매일의 삶이 더욱 나를 연단하시는 주님 앞에 성실하고 합당한 훈련의 시간으로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그저 이 고난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신 상황과 환경 안에서 나의 어떤 면이 변화되고 단련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을 이루는 하루가 되도록 더욱 깨어있게 하시고 매 순간의 삶에 집중되게 하옵소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게 스스로의 선택으로 고난의 기간만 연장시키는 내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고난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그렇게 나도 늘 새롭게 거듭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성령님께서 주목하여 보게 하신 부분은 너무나도 유명한 "벧엘에서 꿈을 꾼 야곱"의 이야기다. 

 

(창 28: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창 28:11)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야곱은 그 곳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야곱은 그 곳에서 돌 하나를 주워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화를 피해, 아버지 이삭이 밧단아람에 있는 외할아버지 브두엘의 집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이었다. 야곱이 어딘지도 모르는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야곱은 그냥 밤이 되어 돌 하나를 주워 베개로 삼고 잠을 청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특별할 것이 하나 없는 그냥 일상의 모습이다. 

 

(창 28:12)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다리 하나가 땅에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창 28:13) 야곱은 여호와께서 사다리 위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네가 지금 자고 있는 땅을 줄 것이다.
(창 28:14) 네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지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창 28:15)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을 꾸게 하셨다. 그것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의 꿈이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야곱은 꿈에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은 사다리 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과도 같다. 

 

(요 1:50)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해서 나를 믿느냐?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 1:51)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결국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통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될 그 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성령이 오셨을 때 이루어질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한 인간인 야곱에게 이토록 일찌감치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에 하나님의 역사를 스스로 이루실텐데 마치 그날이 이르러서 '내가 이렇게 할거라고 미리 얘기해주었지?'라며 하나님의 사람에게 증표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야곱의 하룻밤이, 그의 개인적인 삶의 순간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맞닿게 된 것이다. 마치 그것이 씨줄(개인의 삶의 순간)과 날줄(하나님의 역사)처럼 엮여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수레바퀴가 도는 듯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의 증거를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기도 중의 감동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누실만한 증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깨끗해야 함을 다시 새기게 된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 또한 있습니다. 그 그릇 가운데 특별히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평범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딤후 2:21) 만약 누구든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이신 주님이 쓰기에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야곱에게 주셨다. 이미 선대에 약속해주신 것이었기에 후대에 이루어질 것이 확정적이나(물론 후대가 그 약속을 도저히 받지 못할 수준일 때는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경우도 성경에 있기는 하다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도 다시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대일로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을 새겨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창 28:16) 그 때에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창 28:17) 야곱은 두려워하며 또 말했습니다. “이 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
(창 28: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창 28:19) 원래 그 성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은 그 성의 이름을 벧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창 28:20) 야곱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창 28:21)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여호와를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창 28:22) 내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치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히 온 세상 가운데 편만한데도 우리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순간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다. 

 

야곱은 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이 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차원의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곧 경외함의 차원에서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곱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베개로 삼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우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은 그 성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 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야곱은 그렇게 하나님과 개인적인 언약의 관계를 맺고 순종을 다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받아야만, 즉 Give and Take의 관계가 되어야만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일대일의 언약적 관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성품을 따라 자비와 긍휼, 은혜와 사랑을 사람에게 베풀어주시고(위에서 아래로), 사람은 그런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아래에서 위로)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하는 것이며 그것에는 우리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시간으로, 재정으로, 헌신으로 섬기는 것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오늘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십분의 일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하며 그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헌신이 뒤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 오늘도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꿈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 꿈을 받고, 언약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며 나아갈지는 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룰 통로를 정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주시니 감사드리며, 더욱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을만한 깨끗하고 성결한 그릇으로 내가 거듭나게 하옵소서! 내 안에 더러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거룩하시고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더러움과 흠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여, 용서해주시고 자꾸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연약함을 주의 말씀으로 타파하고,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집중력이 내게 있게 하옵소서! 

 

(히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결코 뒤로 가는 자가 되지 않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자가 되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본향을 향해, 위에 것에 마음을 두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도우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의 본문인 창세기 25~27장을 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창 25:21) 이삭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드리니, 여호와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 25:22)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리브가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며 여호와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관한 뜻을 정하신 바가 있었다. 

 

이게 예정론의 문제로 가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정해두셨는데, 사람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며 복음을 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두셨으니까!) 라는 요상한 문제로 풀어질 수 있어서 다소 조심스러우나 그냥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해온 약 25여년의 시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십차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아주 소중한 진리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바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역사는 History = His(God's) Story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말까지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결코 숨기지 않고 성경에 모두 기록해두셨다. 그 성경을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열리지 않고 풀리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 의지하여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바라보고 성령님께 깨달음을 구하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진실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만한 자들에게는 찾을 수 있도록 다 기록해두셨고 가르쳐주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두 아이를 향하신 뜻을 정해두셨다. 왜 그래야 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인본주의적인 교육을 오래 받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반발심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에 따라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 같고 나의 의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그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대전제가 없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배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 사람의 눈에 고통이고, 고난이고,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인 경우가 많으나 어쨌든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도 조금이나마 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던 두 아이, 에서와 야곱에 관한 뜻을 가지고 있으셨다. 이것은 로마서 말씀에도 설명이 되어있다. 

 

(롬 9:10)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롬 9: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롬 9:12) 리브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불러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롬 9:13) 이것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롬 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정하지 못하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9:16) 그러므로 모든 것이 사람의 요구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에서와 야곱을 향해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다. 

 

(롬 9:17)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은 너를 통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전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롬 9: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만드십니다.
(롬 9:19) 그러면 여러분 중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롬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한단 말입니까? 토기그릇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롬 9:21) 토기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진흙으로 귀하게 사용할 그릇과 천하게 사용할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롬 9:22)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분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면서도 멸망받기로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인내로써 참아 주셨다면 어쩌겠습니까?
(롬 9:23)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영광에 들어가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쩌겠습니까?


결국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토기장이가 필요에 따라 그릇을 만들듯이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실 권한이 있다. 다만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는 내가 어떤 그릇인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다 알 수가 없기에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바대로 순종의 그릇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도 순종의 그릇으로 (아마) 예정되어 있는 것을 이 땅에서 증명할 수 있을 것이요, 반대로 성경이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로마서 1장 말씀처럼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두셨음에도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은 그 자체로(그 선택 자체가) 어찌보면 결국에는 구원받지 못할 자였다는 것을 스스로가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역시 오늘날 우리는 후대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구나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들의 삶의 순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내내 나오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알려주지 않으려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들,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해주셨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오늘 본문에 리브가에게도 하나님은 다 말씀해주셨다. (오늘날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 말씀해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늘 자기 옳은 소견대로,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다 말씀해주셨다. 

 

만약 리브가가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 두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묻고 구했다면 결과는 동일했었을지라도 과정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에서와 야곱 역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을 사람의 관점에서 '이게 무슨 차별이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의 뜻보다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쭤보고 하나하나 순종하면서 나아갔다면 에서도, 야곱도 인생을 그렇게 고달프게 살 필요가 없지는 않았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리브가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적용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에서의 잘못은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창25:34), 야곱의 잘못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꾀와 속임수로 일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랬기 때문에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자신이 죽기까지 야곱을 다시 보지 못했으며(스스로 그 저주를 받겠노라 하였음 - 창27:13), 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야곱을 미워하는 증오심 속에 괴로운 삶을 살았고, 야곱은 에서보다 더한 외삼촌 라반을 만나 엄청난 연단의 시간을 거치고 에서를 두려워 하는 마음 속에서 항상 살아야만 했다. 물론 이삭도 눈이 어두워지고 사리분별이 흐려지면서 에서와 야곱을 분간하지 못한 실수 가운데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선포하고 에서에게는 줄 복이 없게 만든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실수 또한 크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된 것이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은 있으시겠으나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택과 순종의 자리를 허용하시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까지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 인해 얼마나 인생이 꼬일 수 있는지(하나님의 역사는 그 뜻대로 흘러가지만) 여실하게 보여주시며 후대에게 교훈을 삼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통로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오늘날 참으로 세상이 혼란스럽고 더욱 악으로 치닫는 것 같아 마음을 어려울 때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앞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왜 이런 것을 내버려두시느냐 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더더더 악이 관영해질 것이라고 하셨으며 이 세상은 결국 멸망으로 갈 것이라고 이미 성경에 기록하시고 다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이미 예비해두셨고 이 땅은 그 악이 가득해질 때 결국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심판받게 될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골 3: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골 3:2)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골 3:3) 옛 사람은 죽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골 3:4) 여러분 모두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골 3:5)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죄악된 것은 다 버리십시오. 성적인 죄, 악한 행동, 나쁜 생각, 지나친 욕심 등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골 3:6)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골 3:7) 여러분이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했을지 모릅니다.
(골 3:8)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몰아 내려고 힘쓰십시오. 분한 생각, 화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 선하지 못한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골 3:9)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골 3:10)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뜻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보고 안다고 하면서도 정말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을 믿지 않고 나의 옳은 소견 가운데 죄로 나아갔던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미 나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나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나는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의 그릇으로, 의의 도구로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삶에 대해 내 생각을 따라 짐지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자리에 기꺼이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6) 성적인 죄를 범하지 말며, 에서처럼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십시오. 에서는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었지만, 한 그릇의 먹을 것을 위하여 맏아들의 특권을 팔고 말았습니다.
(히 12: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서는 그후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울면서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으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멘! 내 안에 자꾸만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곧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장자의 명분을 파는 죄악이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정신차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은 창세기 22~24장이었는데 성령님께서 각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에 대해 주목해서 보게 하셨다. '여호와 이레'의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라 내 생각이 마구 마구 솟아올랐다.

그렇지,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졌지

자기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다니 정말 엄청난 순종이야

역시 믿음의 아버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할 수 있어야지

이런 믿음을 드려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데, 아 나는 뭐지?

이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가려는 순간!

아차! 묵상은 이렇게 하는게 아니지, 내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성경을 풀어달라고 구해야 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성령님이 멈추게 해주셨다, 감사합니다!) 

다시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잠잠히 구했다. 

 

그랬더니 나의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고, 갑자기 나의 시선이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동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시선! 그 마음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 22:1) 이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22장의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닥뜨릴 때,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시니 퍽이나 좋으십니까?"라고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는 듯한 마음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절대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의 인생에 무엇인가를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시작부터 나의 죄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찾고 구할 기회를 주시고, 그 영혼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든다면 그의 인생이 새로 태어나게 도와주시는 좋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그를 부르신 것 자체가 아무 뜻 없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조물주가 장난치듯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새겨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볼 때, 온 땅을 두루 감찰하다가 자신을 향하여 귀기울이고 있는 영혼을 부를 때 그가 즉각 답을 한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기쁠까? 그(아브라함)가 나(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마음이 열려있고, 또한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내가 창조한 피조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실 것 같다.(이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태도를 볼 때에도 계속 연결되는 마음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네 아들을 잡아,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한 다음에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실로 엄청난 말씀을 하셨다.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통로인 그 아들을 태워 드리는 제물로 바치라니!!! 그런데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이룰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하고 번제물이 될 아들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브라함은 흔하디 흔한 사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삭을 바치라니요? 이삭이 어떤 아들인지 하나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럴리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많은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미 약속하셨는데요? 제가 잘못 들은거겠지요

말도 안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죽입니까? 하나님, 그렇게 잔인한 분이셨나요?

등등등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법한 소리를,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이럴까? 저럴까? 설마 그럴까? 사람의 생각으로 왔다 갔다 분분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도 않고 즉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 그래! 잘 한다! 바로 그거다!
이제 앞으로는 쭉 내가 말한대로만 해라. 그 길로 너는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통과해내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창 22:4) 삼 일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멀리에 그 곳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모리아 땅으로 가기까지는 무려 3일이나 걸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즉각 길을 떠났지만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가야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도중에서 포기하는가?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과정 중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 곳에 도착해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는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과정이 결론은 아닌 것이다. 결론은 거기까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우리의 목표가 본향인 천국인 것처럼!!!)

 

3일이나 걸린다 하더라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었기에,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할 수 있도록,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내 아들아, 내 딸아, 잘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이제 다 와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라.
이 길의 끝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외치며 우리를 안아주시려고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창 22:5) 아브라함이 자기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귀와 함께 이 곳에 머물러 있어라. 내 아들과 나는 저쪽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겠다.”
(창 22:6)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자기 아들에게 지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챙긴 후, 아들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창 22:7)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창 22:8)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은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이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든 장면일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설교들이 이 당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상상해서 '매우 인간적인 고뇌'가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었을 것 같이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가는 이 길에서 고통스러워 하거나 괴로워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삭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는 전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에게 지게 했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후에 부지런히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삭이 보기에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이 보이지 않아 천진난만하게  그 양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참으로 지혜롭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가리운 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계속 묵묵히 아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갔다. 

 

이것에 대해 당시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는데도 아들을 바칠 준비를 한 것입니다.
(히 11:1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네게 약속한 후손은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 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으나 거기에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고자 불과 칼을 챙겨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에게 약속한 후손이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라고 하셨는데도 이삭을 죽이라 하시는 것은 "아!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구나!"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그가 실제로 본 적도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데리고 갔을 때, 그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 네가 나를 알아주는구나!
네가 나의 선한 뜻을 아는구나.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 내가 몹시 기쁘다.
나의 능력을 알아주니 내가 너의 믿음대로 다 보여주고 싶구나!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주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알아주고,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드린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매우 기쁘시지 않을까? 

 

(창 22:9)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창 22:10) 그리고 나서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창 22:11)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러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창 22:12)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대신에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창 22:14) 이 일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당도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지체하지 않고 그 곳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기껏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목적지까지 다 와서 자신의 의를 드러낸다거나 다른 엉뚱한데로 새지 않고 그는 원래 그 목적지까지 온 이유를 확실하게 하며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불러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그를 말렸다. 그러면서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을 때 나무에 뿔이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보았고, 그는 비로소 '이 숫양을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숫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창 22:15) 여호와의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 22:16) 천사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바치려 했으므로, 맹세코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겠노라.
(창 22:17) 내가 분명히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며, 네 자손은 원수의 성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창 22: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므로, 네 자손을 통해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는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려 했기에,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새겨주셨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 이미 하셨던 약속에 대한 보증에 보증을 거쳐 주신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증해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여정을 통해 아들 이삭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순종을 드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실로 체험했다. 즉, 내가 죽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만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었으리라! 아직 그의 눈 앞에는 당도하지 않은 후손대의 일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 숫양을 준비해두신 것처럼 앞으로의 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도하시며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브라함 안에 더욱 확고해졌을 것 같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래, 자랑스럽다 나의 아들아! 내가 이 상을 주기 위해 너를 이 곳으로 불렀노라. 
네가 순종하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못 받았을 이 상이,
이제 진실로 가야 할 자리를 찾아갔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온 땅을 두루 살피며 나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너를,
내가 창조한 것이 진실로 기쁘다. 
내가 마련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여라.
너의 누림이 곧 나의 기쁨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험을 멋지게 통과해냈을 때 하나님은, 자기가 한 것보다 자녀가 한 것을 더욱 기뻐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마 25:31)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마 25:32) 그 때에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모일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가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마 25:33) 인자는 자신의 오른쪽에는 양을, 왼쪽에는 염소를 둘 것이다.
(마 25:34) 그 때 왕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너희들이여, 와서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아라.
(마 25:35) 내가 배가 고플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마 25:36)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는 내게 옷을 입혀 주었다. 내가 아플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당신께서 주실만한 복을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어주기를, 그래서 마음껏 붓고 붓고 또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요10:10)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기를 원하시는, 정말로 좋고도 선하신 것이다. 

 


 

(약 1:12) 시험을 받은 후, 더 강건해졌다면 복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멘아멘!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은 나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에서 나의 믿음을 증명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상을 주시려고 모든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니 지금 내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에서 상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좋으신 분임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임을, 선하신 분임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도 순간 순간 인생에 닥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고 요동했던 모든 불신앙의 순간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주님께서 나에게 순종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을 진실로 순종하는 행함으로 나아갈 때 상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롯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 비하면 짧게 서술되어 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롯에 대해 집중케 하심이 있어서 롯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려주셨다. 

(창 18: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8)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8:19)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악하다.
(창 18: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셨다. 


(창 18:22) 그리하여 세 사람은 그 곳을 떠나 소돔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창 18:23) 아브라함이 주께 다가가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착한 사람들도 저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창 18:24) 만약 저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 성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저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 오십 명을 위해 저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창 18:25) 제발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니 옳은 판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천사가 소돔 쪽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서 하나님께 그 성에 의인이 있는데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실 것이냐고 물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주여, 노하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해 주십시오. 만약 열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열 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 ㅠㅠ)

 

창세기 19장에서 두 천사가 소돔을 살피러 갔다가 그들의 악함에,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롯에게 알려준다. 

 

(창 19:13) 우리는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이 성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대해 모두 들으셨소.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오.”

(창 19:15) 이튿날 새벽이 되자, 천사들이 롯에게 빨리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둘러 여기 있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나가시오. 죄악으로 인해 이 성에 심판이 임할 때에 당신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창 19:16) 그래도 롯이 머뭇거리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창 19:17) 두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살려면 이 곳을 피해야 하오.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마시오. 산으로 도망가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죽을 것이오.”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임박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롯은 그 당시에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기까지 해주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천사는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말라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를 해주었다. 

 

(창 19:18) 그러자 롯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제발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19:19) 주께서는 주의 종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산까지 달려갈 수 없습니다.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저도 죽을까 두렵습니다.
(창 19:20)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저 성은 도망가기에 가깝고도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저 성으로 도망가게 해 주십시오. 저 성은 참으로 작지 않습니까? 저 성으로 도망가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창 19:21) 천사가 롯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일에도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당신이 말한 저 성은 멸망시키지 않겠소.
(창 19:22) 하지만 빨리 도망가시오. 당신이 저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 없소.” 그러므로 그 때부터 그 성은 ‘작다’는 뜻으로 소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신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감사함으로 소돔을 기꺼이 떠나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죽을까봐 두렵다"라고 하며 본인이 생각했던 적당한 거리의 소알 성으로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천사는 그런 그의 그 부탁까지도 들어주었고,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창 19:29) 하나님께서 골짜기의 성들을 멸망시키셨지만 아브라함의 부탁을 기억하셔서, 롯이 살던 성을 멸망시키실 때에 롯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중보) 덕분에, 정말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소돔을 떠날 것을 머뭇거렸으며, 소돔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가 보기에 적당한 소알 성에서 머무르기를 원하였다. 

(창 19:30) <롯과 그의 딸들> 롯은 소알에서 계속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두 딸은 산으로 이사했습니다. 롯은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소알에 살면서도 계속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산으로 이사했고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국 그 동굴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악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이 "세상 사람들이 다 결혼하는데 우리와 결혼할 남자가 없으니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하여 잠자리를 갖고 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갖자"라는 몹쓸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다. 

 

롯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경꾼마냥 자기의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서 롯이 소돔에 살다가 왕들의 전쟁 가운데 붙잡혀 갔을 때도 아브라함이 구출해주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소돔에서 도망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롯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도움은 받았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롯이 계속해서 구원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적당한 곳에서 타협하고, 소돔이 멸망한 것을 보고서도 자신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다는 것을 볼 때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일 4: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롯과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아 알면서도, 계속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무르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는 것이기에, 나의 최종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또한 중보기도의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국 내가 행한 것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임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새겨야겠다.  

(전 12:14)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히 9:27)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내 안에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임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롯과 같이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내 안에서 소멸되도록 더욱 진리의 빛을 밝혀주사 진리를 알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죄에서 떠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더 이상 롯과 같이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세상의 어떠함을 괴로워하고 두려워 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5~17장까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람의 생각과 말 VS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창 15:1)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다> 이 일들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창 15:2)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창 15:3) 아브람이 또 말했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지키시며 그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을 주셔도 소용이 없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 종이 나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창 16:1)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인 여종이 있었습니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아이를 갖도록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으니 자기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그러면 그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성경에 흔히 나오는 '사람의 경륜'에 따른 생각과 말이다. 사래도 사람이었기에 지극히 사람다운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창 17:15) <약속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라 라고 하여라.
(창 17:16) 내가 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를 위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다. 또 내가 사라에게 복을 줄 것이니, 사라는 여러 나라의 어머니가 되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사라에게서 나올 것이다.”


(창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사라는 나이가 아흔 살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창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 이라고 하여라. 내가 네 아들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네 아들의 자손과 세울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창 17:20) 네가 이스마엘에 대해 한 말은 내가 다 들었다. 이스마엘에게도 내가 복을 주어, 그에게 많은 자손과 후손이 있게 하며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큰 지도자 열두 명의 아버지가 되고,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창 17:21)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운다. 이삭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쯤 낳을 것이다.”
(창 17: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나누신 뒤에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될 것이라 하시고(창17:5) 많은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하라고 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겠느냐, 사라는 나이가 90살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란다'고 지금 그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실 것이고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까지 소상하게 이미 말씀을 해주신 바가 있다. 

 


(창 15:5)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기에 정말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땅의 관점에서,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 당시의 아브람과 사래의 생각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본다. 

 

사실상 내 생각과 내 말은 하등 필요가 없다. 나는 끽해야 7~80년을 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키락 한 올도 내 마음대로 검게 하거나 희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인데,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내가 정말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고, 무슨 뜻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것을 '듣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은즉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해야하는 것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먼저는 땅에 속한 사람의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할례도 행하고, 이후에 이삭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증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히 6: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히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히 6:15) 아브라함은 인내를 가지고 이 약속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히 6:18)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으시며, 거짓 맹세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는 이 두 사실은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며, 우리가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히 6:19)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내 생각, 내 말을 들이밀지 말자. 내 수준대로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한낱 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열자! 내 생각과 내 말이 앞서기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것에 더욱 매달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요 15:4)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아멘! 참으로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품기보다는 나의 옳다하는 소견을 주님께 들이밀며 '이러면 어떡해요, 저러면 어쩌지요' 하는 자리가 결국에는 불신앙의 자리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회개합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내 말이 앞서지 않도록 제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내 생각으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자리가 없도록 제 생각에도 재갈을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품기 전에 너무나 많은 내 생각으로 온갖 말을 했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성령님이 오셨으니 그 성령님을 더욱 의식하고 더욱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빠르게 하옵소서! 그리해야 내가 살겠나이다! 그리해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겠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서도 자꾸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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