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정독 본문은 요한복음 18~19장이었다. 대망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오는 부분이다.

 

이 말씀을 정독하며 아주 아주 눈에 들어오는 구절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것이다. 

 

(요 18:9)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자 중에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 18:32) 이로써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맞을 것인지에 관해 전에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요 19:24) 그래서 군인들은 “이것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누가 가질지 정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되리라고 말한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가지려고 제비 뽑나이다.”

(요 19:28) 이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9:36)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쓰여진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요 19:37) 또 다른 성경에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볼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성경 말씀을 이루는(성취하는) 삶'이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의 포커스는 오직 '말씀을 이루는 것'에 있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마치 허무한 결말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메시아라고 하던 분이 어찌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냐!' 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말씀의 성취를 위한 과정이었다.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사람 제물이 필요했기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고 대신 죽으심으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 이후부터 줄곧 준비해오신 대속의 거사였고, 예수님은 그 일을 기꺼이 순종하심으로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구약성경은 계속해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말씀은 이미 모두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말씀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결코 감추지 않으시고 성경에 기록해두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삶을 사셨듯이 그렇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역시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어떻게 보이던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이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시대라고 하셨고, 앞으로 주어질 세상에서의 고난은, 이 세상의 끝에 반드시 있으리라 하셨던 일이 성취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또한 그저 막연한 장밋빛 미래를 구상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악으로 더 치닫고, 말세에 있으리라 하셨던 일들이 이루어지는지를 깨어서 바라보며 내 자리에서 할 바에 충실해야 하리라. 

 

(마 24:3)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말해 주십시오.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마 24: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마 24:5)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마 24:6) 또한 너희는 전쟁에 대한 소식과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이런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다.
(마 24:7) 민족이 다른 민족과 싸우기 위해 일어나고, 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우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여러 곳에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마 24:8) 이런 일들은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에 불과하다.
(마 24:9) 그 때, 사람들이 너희를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나 때문에 너희가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질 것이며, 서로를 넘겨 주고, 미워할 것이다.
(마 24:11) 그리고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마 24:12) 또한 불법이 더욱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 24:14)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며, 모든 나라에 증거될 것이다. 그 때서야 세상의 끝이 올 것이다.” 

 


 

존귀하신 주님,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조차 이 땅에서 자신의 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만 말씀하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일만 하셨는데 내가 무엇이관대 나의 것을 감히 주장할 수 있는지, 주여,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세상 가운데 있을 일들을 성경에 모두 기록해주셨습니다. '나는 몰랐다'하는 것이 결코 용인될 수 없을만큼 마지막 때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여, 더욱 주님의 말씀이 제게 엄위하게 다가오게 도와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의 성취를 위한 삶을 사셨듯이 그렇게 저 또한 '반드시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성취하는 순종의 자리에 있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할 일들의 연속이다. 

그러다가 지쳐서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다시 할 일들을 하고 잠시 놀다가 ㅎㅎㅎ 이제야 오늘의 정독이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좀 지쳐서^^; 길게 글을 쓸 수는 없겠고, 레마의 말씀만 정리해두어야겠다. 

 

(요 16:8) 보혜사가 오시면, 그분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한 것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요 16:9) 그분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말해 주실 것이며,
(요 16:10) 내가 아버지께로 감으로써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요 16:11) 이 세상 통치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 심판에 관하여 그분이 책망하실 내용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다.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가 더 이상 이 땅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 

 

이 세상의 공중권세를 잡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자기가 승리한 줄 알았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옛뱀의 머리를 밟으셨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이 세상의 통치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요 16:12) “내게는 아직 너희에게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들은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될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 16:14) 진리의 성령은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요 16:15)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다. 그래서 내가 성령께서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신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도저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이 살려지지 않은 채, 혼과 육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말씀을 들을 수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지식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계시해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 당신을 감추어두지 않으셨다.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다. 은혜! 은혜로다!

 

(요 1:9)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요 1:10)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요 1:11)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 1: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요 1:13)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즉,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죄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회개할 때 혼과 육으로만 살던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오셔야만 우리의 눈이 진리에 밝아지고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땅의 것들의 하찮고 비루한 것들로부터 내 영혼을 지켜주시고, 깊고 부요한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 : 삶을 위로하는 순글씨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heon_sun

 

 

 

 

 

오늘도 시간 관계상 레마의 말씀만 정리해야겠다. 

 

 

(요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내 안에 계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요 14: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행한다는 사실을 세상은 알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이 곳을 떠나자.”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이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요 15: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고 그의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을 것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조차 스스로 하는 말이 하나도 없으셨고,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만을 따라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명하신대로만 행하셨다. 

 

하물며 예수님도 그러하셨는데, 내가 뭐라고 자꾸 내 생각, 내 감정, 나의 어떠함으로 나갈 수 있으랴...

 


 

주여,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습니다 ㅠㅠ 내 속에 있는 육체의 성정을 진리로 파하여주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셨던 것과 같이 그렇게,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고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일만 하는 수준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정독 본문은 요한복음 12~13장이다. 오늘 말씀에서 성령님은 정말 내 마음을 잘 아시고 다시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로 이 글을 시작하겠다!

 

(요 13: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모든 것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고민을 할 때 이런 말을 한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 고찰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고민의 근본으로 들어가보면 결국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에 대한 해답이 없어서 혼란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확고한 답을 주고 계신다.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 우리 인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살다가,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생의 과정이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거기서부터 어긋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내 힘과 내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가 내 맘대로 안되니 지치고, 주변 사람들과 나의 삶을 비교하다가 마음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내 인생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를 때 우리는 끊임없이 이 땅에서 요구하는 소위 성공적인 인생을 추구하게 되고, 내 삶이 이 세상의 조건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낙심과 좌절의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는가? 예수님도 이 땅에서의 삶이 마냥 편하고 쉽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대사명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이었기에 십자가를 반드시 지셔야 하는데 이것이 육체의 몸을 입고 있는 예수님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단 한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내침을 받으셔야 하는 일이었기에 괴롭기 그지 없는 상황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때를 모면하려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이 때를 위해 온 것임을 다시 상기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간구하셨다.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무척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온 것입니다.
(요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그 때, 하늘로부터,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이렇게 사실 수 있지!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 오늘 말씀에 한 사람 더 살펴볼만한 인물이 있다. 

 

(요 12:3) 마리아가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습니다.

 

바로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 '마리아'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께 매우 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다. 마리아가 한 일에 대해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요12:5)라고 할 정도로,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마리아는 아주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다. '그 비싼 향유를 왜 이 한 사람에게 쏟아 붓는거지? 더 가치있는 일에 쓸 수도 있는데 이렇게 붓다니, 아깝게 말이야'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깨달았고, 지금 내 눈 앞에 계신 이 분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실 것이라 말씀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대로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대사명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그의 장례준비를 위해 향유를 부은 것이었다. 

 

(요 12:24)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요 12: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 12: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의 (육신의) 생명만을 위해서,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국에 영혼의 생명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 뜻대로 살고 싶은 그 마음을 버리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삶을 거절한다면,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여주실 것이라 하시니 이것이 얼마나 이 땅에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인가?!!!

 

(갈 6:8)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갈 6: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이것이 진리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이고 성공한 것 같아도 하나님 없이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만을 거둘 뿐이다. 하지만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이다. 이것을 어찌 감히 비할 수가 있으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선하고 가치있는 일이 눈에 보이는 열매를 아직 맺지 못하고 있다 하여 스스로 낙심치 말고,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을 기대함으로 포기하지 말고 오늘을 또! 성실하게 심으며 나아가자!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데도 이 땅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 그저 육신의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에 우울함과 낙심과 요동함을 허락했던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자꾸 나의 육체를 만족시키고 싶은 헛된 생각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이 시간에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을 갖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진짜 제대로 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 받을 상급을 기억하여 정말 가치있는 것에 나의 시간과 마음과 재정을 심게 하옵소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이 땅의 잠시 잠깐의 시간 동안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갈 수 있도록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오니 나의 길을 지도해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레마의 말씀만 정리해야겠다.



[요9:27, 쉬운성경]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다 말해 주었는데, 왜 들으려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다시 듣고 싶으십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그러십니까?"

[요10:6, 쉬운성경]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10:24-25, 쉬운성경]
24 유대인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들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게 할 작정입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터놓고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25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였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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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1:25-26, 쉬운성경]
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40, 쉬운성경]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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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0:17, 쉬운성경] 따라서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얻게 되고, 말씀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오늘의 성경 정독 본문은 요한복음 7~8장이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나를 돌아보게 해주시는 말씀은!

 

(요 8:29)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언제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므로,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요 8: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텐데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지금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보내셔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니 하나님과 같은 분이나 이 땅에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런 예수님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신다니! 내 안에 오고가는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참으로 많은데....ㅜㅜ 주여, 용서해주시고 저를 새롭게 해주소서!

 

(요 8:43) 너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버지 마귀에게 속하여 너희 아버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기를 원한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마귀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마귀는 진리 안에 서지 못한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쟁이의 아버지이므로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다.
(요 8:45)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이다.
(요 8:46) 너희 중에 내가 죄인이라고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데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왜 나를 믿지 않느냐?
(요 8:47)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는 뜻과도 같다. 나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아담의 원죄로부터 죽었던 영이 살려진 자가 되었으나 나의 혼은 아직까지 세상에서의 경험과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 자리가 있다.

 

그렇다보니 내 혼이 진리를 따르면 내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지만 내 혼이 내 생각과 내 감정 즉, 세상으로부터 받은 교육에 의거한 가치관과 관념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마귀에게 속하여, 나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 육체의 아버지인 마귀가 시키는대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말씀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롬 6:12) 그러므로 죽게 될 여러분의 몸에 죄가 왕노릇 하여 몸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롬 6:13) 또한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롬 6: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에게 왕노릇 할 수가 없습니다.

 

내 혼이 더욱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말로 내 몸이 내 생각과 내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의를 행하는 도구로서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나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이며 결코 죄가 내게 왕노릇을 할 수 없다. 

 

 


 

주님, 하루에도 수십번 나의 혼은 죄를 짓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쁘하게 하지 못할 생각과 감정들을 품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더욱 진리로 채워져서 고민없이 진리만 따르게 하옵소서!

 

나는 이미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라 하셨사오니 죄가 결코 내게 왕노릇 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새기고 붙들고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성령님께서 유독 나의 마음을 두드리신 부분은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이야기였다. 

 

(요 5:1) 얼마 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근처에 기둥 다섯 개가 있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요 5:3) 이 곳에는 병약한 사람, 앞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요5:4) 없음 - 어떤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가끔씩 주의 천사가 연못으로 내려와 물을 휘저었는데, 이렇게 휘저어 놓은 연못에 제일 처음 들어간 사람은 그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은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곳으로 여겨졌기에, 온갖 다양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기다린 곳이었다. 

 

(요 5:5) 거기에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요 5:6) 예수님께서는 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기를 원하시오?”
(요 5:7) 병든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가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저보다 앞서서 물 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거기에 38년 동안 병을 앓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자마자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누가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질문은 "낫기를 원하시오?"라는 것이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이 말씀이 얼마나 본질적인 질문인가를 성령님께서 돌아보게 해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에 대해 그 병자는, 내가 살을 조금 더 붙여서 설명을 해보자면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야 치유를 받을 수 있는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병이 낫지 않았고 여지껏 이 자리에 있었다"는 내용의 답을 한다. 

 

예수님의 질문은 "낫기를 원하시오?"였는데, 이 병자의 답은 그 질문에 "네! 간절히 낫기를 원합니다!"가 아니라, 38년 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던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내 영혼이 진짜로 원하는 것'보다도 '난 이것 때문에 안돼, 난 이래서 못해, 환경이 이렇잖아, 어쩔 수가 없잖아?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것이 그에게는 더 크고 우선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죄인 '나 중심적인 사고' 안에 그가 갇혀 있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사람이 예수님의 질문처럼, 정말로!!! 낫기를 원했다면 과연 그 자리에 계속, 그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까? 묵상을 하다보니 결국 그의 영혼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는 채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처음에는 낫기를 원해서 베데스다 연못가까지 나아왔겠으나 어느새 이 땅에서 도저히 안되는, 나 중심의 생각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하고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의 감옥 속에서 정말로 내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돌아보지 못한 채 '언제가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에 안주하여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채로 그 연못가를 배회했을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내 안에 그려진다. 그 당시 이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다보니, 나 또한 순간 순간 정말로 나의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채 '나'라는 감옥 속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상황과 환경에 눌리고 끌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를 돌아보게 된다.

 

낫기를 원하시오?

살기를 원하시오?

구원받기를 원하시오?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오?

 

예수님은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하시는데,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는 이게 안되고요, 나는 이게 힘들고요, 상황은 이래서 안되고요, 현실이 이래요" 라며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성경 묵상은 이래서 필요하고, 이래서 좋다. 땅에 머무르던 나의 시선을 성령님께서 하늘 차원으로 끌어 올려주신다.)

 

우리 인생에 있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죽음 앞에서는 지금 내가 문제라고 하는 것들, 어쩔 수 없다 말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이 모두 무의미해져버린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바로 곁에서 여러 번 지켜보았던 나는,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모든 우선순위가 재정립되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가치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사람은 모든 빈 껍데기들을 내려놓고 가장 원초적인 간구를 하게 된다. '살고 싶다'라고...

 

38년 된 병자도 결국 '낫고 싶다'는 것이 '살고 싶기 때문에' 낫고 싶은 것이었기에, 자기도 나름대로 살 길을 찾고자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정말로 그의 영혼의 본질적인 간구를 놓치고, 보이고 들리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가득 채운 채로 남탓만 하며 베데스다 연못가를 떠날 수도 없고, 낫지도 않는 어쩡쩡한 상황에서,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주저앉아 있을 때.....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고, 그에게 본질을 새겨주신다. 그러나 그는 낫고 싶다는 원초적인 바람,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눈 앞에 계셔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중심적으로, 내 식의 말만 쏟아냈다. 그러나 사랑이신 예수님은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는 채 이 땅의 말을 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내가 안되는 이유 수백가지를 끌어안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며 그 죄의 굴레에 갇혀 있는 영혼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순했다.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

 

그 때 그의 안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또 쏟아냈겠지. "지금 내 말을 이해 못했어요? 나는 지금 병을 앓고 있다고요, 이미 38년이나 되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일어나요? 게다가 침상을 들라고요? 이 무거운걸? 나 지금 아픈데? 침상을 들고 걸을 수 있으면 내가 안 아픈 사람이게? 내가 왜 베데스다에 와 있는데, 나으려고 와 있잖아요? 내가 지금 아직 아프다고! 나는 안된다고! 아무도 나를 안 도와줘서 병이 안 나았다고! 그래서 못 일어난다고! 근데 일어나라고? 근데 침상을 들라고? 근데 걸어가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바로 요놈의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해져서 이게 '나'라고 믿는 바로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내 감정, 내 사고, 내 관념" 말이다. 이걸 어떻게 버리라고, 이게 없으면 내가 아닌데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이걸 버리라고 하느냐 싶겠으나,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셨고, 내가 지고 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가볍고 쉬운 멍에를 메라 하셨다. 이게 영생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제시해주셨는데도 그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내 말이 너무 앞서는 것이 문제다. 내 말은 결코 나를 살릴 수 없음에도 그것을 미련하게 붙들고선, 진리를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나도 모르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해주시려고, 살리시려고 작정을 하셨다. 그랬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마자 그 즉시, 그 남자는 병이 나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본질적인 그의 영혼의 원함이 무엇인지 질문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에 그 말씀을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되겠다!라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기에 하늘에서 작정하신 치유가, 이 땅에서 그의 믿음과 합해져 이루어지는 순간이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신의 원함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상황과 환경에 끌려, '나'라는 감옥 속에서 죽은 것 같이 살아가던 한 영혼에게 찾아오셔서 치유의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병이 치유된 그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보시오, 당신은 이제 다시 건강해졌으니, 더 악한 일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이 땅에서의 모든 어려움은 결국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에, 그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더 악한 일이 닥치지 않게 다시 죄를 짓는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해결이 중요하고, 당장 이 땅에서 나를 죽일 것 같은 일들로부터 놓여나기를 원하나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상기시켜주신다. "낫기를 원하시오?"라는 질문처럼 말이다. 

 

(요 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
(요 5:40) 하지만 너희는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야곱의 고백처럼 고달프고 고생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결국 본질은 '나'라고 하는 존재적인 죄의 굴레로부터의 '구원'과 '영생'(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와 너무 동떨어져 있고 내가 지금 예수님께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오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질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겠다. "낫기를 원하시오?"

 

당장 나를 죽일 것 같은 문제 앞에서 내 영혼의 아주 본질적인 원함이, 간구가 무엇인지를 무시하지 말자. 내 영혼의 신음이 들린다면 내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꾸만 내 영혼의 원함을 가리우고 나를 속이는 나의 생각들에 진리의 빛을 비춰달라고 간구하며,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영생은 곧 한 분이신 참 하나님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시오."라고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하신즉 이루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주님, 성경을 보면 항상 예수님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땅의 일을 말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나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죄악의 어둠 속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성경의 말씀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썩어 없어질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더 사실적이고 더 진짜인 말씀의 성취를 가로막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현실에서 어렵다 하는 문제들 앞에서 자꾸만 내 말이 앞서고, 내 경험, 내 지식, 내 생각, 내 판단의 감옥에 갇혀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앞으로 요한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구원과 영생에 대해 더욱 깊이 묵상하며 하늘 차원의 삶에 대해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시고, 진짜로 하늘 차원의 삶을 살아내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연수 안에서 사명을 다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영혼 안에서의 울림은 참으로 큰데, 이것을 사람의 말로 풀어내고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 제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셔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표현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점점 나는 사라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남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정독 본문이 이제 요한복음으로 넘어갔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내 눈이 세례 요한에게 머물게 하셨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게 한 사람이었다. 

 

(요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 1:7) 요한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요 1:8) 요한 자신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요,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명을 가진 자였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었는데,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 몇 사람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게 하였다(요1:19)

 

(요 1:23) 요한은 그 사람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주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만들어라’ 하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오늘 성경을 읽으며 이 말씀에 얼마나 마음이 울컥하던지...세례 요한은 진정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만들어라' 하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라고 자신을 정의하였다. '나'는 없고 주님을 위해 외치는 사람의 '소리'로만 존재할 수 있다니...정말 엄청난 수준이다. 나는 아직도 매순간 내가 하고 싶고, 하기 싫고, 나는 이게 좋고 저건 싫고, 여전히 '나'라는 존재 때문에 씨름하는 경우가 많은데ㅜㅜ 세례 요한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길을 예비하라고 먼저 보내신 사람의 수준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세례 요한이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는 것을 보며, 그의 자격에 대해 의문을 가진 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까?"라고 따졌지만 요한은 당당했다. 

(요 1:26)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십니다.
(요 1:27)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격을 따져 묻는 자리에서조차 내 자격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증명하려 들지 않고,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예수님께 돌린다.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계시는데, 그분은 내 뒤에 오시기는 하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아! 이 말씀도 정말 울컥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로 '나'라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직 그가 오시지 않아서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으나 실제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겸손이 아니라 그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이신 분이시기에 그는 감히 그분과 비교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진실로 낮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라고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아래와 같다. 

(요 1:33) 나 역시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 분이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바로 그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34)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았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누가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바로 그분인 줄 알아라" 라고 하셨기에,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여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나온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다. 

(요 3:12) 내가 너희에게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말했는데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데, 내가 너희에게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실 때,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을 가지고 증명하셨어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깨닫지도 못할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씀하시는 이 부분에서, 세례 요한은 바로 이 '하늘의 일들'을 듣고 믿고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위로부터 오신 분, 곧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으로서, 태초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시면서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에 반해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하는 수준에 있기 때문에 '하늘의 일들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아멘아멘! 땅에 속한 사람의 수준에서는 하늘의 일을 말해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기에 하늘의 일을 알려주시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태에서부터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선택받아 이 땅에 보내진 것이었으며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는 자신이 쇠하여 지는 것에 대해 조금도 요동하는 마음없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요 3:28) 너희들은, 내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분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증인들이다.
(요 3:29) 신부의 주인은 신랑이다. 신랑을 기다리며, 그가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한다. 나의 기쁨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나의 기쁨이 이제 이루어졌다.
(요 3:30)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그가 오시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고, 세례 요한은 눈 앞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빛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 그대로를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음을 얻도록 하는 일에 쓰임받았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나는 없고 예수만이 사는, 주의 종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성령님은 오늘 내게, 이 모습이야말로 내가 회복해야 하고 또한 지향해야 하는 주의 종의 모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듯하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오늘의 말씀 안에서도 레마의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두드리시고 정신차리게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왔으며 저 또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거듭난 인생으로서 그 빛을 만났으니 오직 그 빛을 증언하는 일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함에도 자꾸만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죄된 육성이 깨어지고 그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세례 요한은 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을 사는 동안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모습을 볼 때 아직도 많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자리가 있습니다. 주여,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제 안에 이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이 말씀으로, 기도로 파쇄되게 하옵소서! 주의 종으로서 더욱 거룩히 구별된 자가 되도록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주만 따르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성경정독의 본문 창세기 48~50장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 중에 하나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다. 창세기를 묵상하는 내내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었다.

특히 오늘 본문 중에 성령님께서 내게 레마의 말씀으로 주셨던 것은 아버지 야곱이 임종 전에 요셉과 두 손자를 불러 축복해준 것과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요셉에게 주었던 축복에 대한 부분이었다.





[창48:3-6, 쉬운성경]
3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루스에서 나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나에게 복을 주셨다.
4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고 많은 백성의 아버지로 삼아 주겠다.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영원히 주겠다.'
5 네 두 아들은 내가 오기 전에 이 곳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부터 그 애들은 내 아들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내 아들이 될 것이다.
6 너에게 다른 자녀가 생긴다면 그 애들은 네 자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애들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마찬가지로 땅을 받게 될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루스(벧엘이 된 곳)에서  자기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요셉에게 전한다. 임종 전에 자녀에게 하는 유언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게 마련일 것인데, 이 자리에서 야곱은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그만큼 야곱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인의 노력으로 일군 어떤 것을 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전한 것이다. 아, 이 얼마나 부럽고 또한 소망되는 일인가? 나 또한 죽기 전에 내가 이룬 것을 자랑하듯 말하는게 아니라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고 전하는 자가 되고 싶다!


[창48:21-22, 쉬운성경]
21 그리고 나서 야곱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계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네 조상의 땅으로 다시 데리고 가실 것이다.
22 너에게는 네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주겠다.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세겜 땅을 너에게 주겠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은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를 조상의 땅으로 다시 데리고 가실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주겠노라 약속한다.

그리고 야곱은 12명의 아들들에게 각각 그들이 살아온 세월 가운데 아버지의 눈에 보였던 것들을 이야기하며 축복과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 중에서도 요셉은 가장 길고 풍성한 축복을 받았다.

[창49:22-26, 쉬운성경]
22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 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23 사람들이 그를 화살로 맹렬히 공격하고, 무섭게 활을 쏘아댄다.
24 그러나 요셉의 활이 더 잘 맞고, 요셉의 팔이 더 힘세다. 요셉의 힘은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오고, 그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바위이신 목자에게서 온다.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땅의 샘물로 너에게 복을 주신다. 네 아내들이 많은 아이들을 낳게 하심으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네 짐승들이 많은 새끼들을 낳게 하심으로 너에게 복을 주신다.
26 네 아버지의 받은 복은 영원한 산들의 복보다 크고, 변치 않는 언덕들의 복보다 크다. 이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내리기를. 자기 형제들과 헤어졌던 자의 이마에 내리기를."


요셉이 아버지의 유언에서 이렇게 큰 축복을 받은 것을 보니, 그가 일찍이 아버지 곁을 떠나 이방 땅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난과 연단의 시간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하나님은 야곱의 유언을 통해 요셉을 '자기 형제들과 헤어졌던 자'라고 칭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쓰임 받으며 이집트에서 했던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신 것이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 신약성경의 말씀이 떠올랐다.

[막10:29-30, 쉬운성경]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나와 복음을 위해 자기 집과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또는 밭을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핍박과 함께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그리고 밭을 백 배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눅18:29-30, 쉬운성경]
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배로 받을 것이요.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로 이 땅에서 행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이 세상에서는 고난 받았으나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땅을 약속 받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집과 형제, 자매, 부모, 자녀 등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버릴 수 없다(차선으로 둘 수 없다)하는 것들을 버렸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비록 핍박이 따를 수는 있으나 밭을 백 배로 받을 것이요, 오는 세대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신 것이다.


[전12:14, 쉬운성경]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계21:3-4, 쉬운성경]
3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요셉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낱낱이 기억하시고, 그에게 이 땅에서도 형통한 복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복도 풍성하게 주셨다.

우리의 삶 또한 지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반드시 갚아주시는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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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좋고도 위대하신 하나님! 말씀하신즉 이루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계시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깐이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함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영원한 것을 위해 오늘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심는 것에 게으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의 중심과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시며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주실 상벌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할 때 매 순간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더욱 의식하여 죄를 멀리하고 진리만을 좇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의 본문은 창세기 45~47장이었다. 창세기 45장에서 드디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창 45:3)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가요?” 그러나 형들은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창 45:4)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그러자 형들이 요셉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

 

형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높은 자리에 있었던 이집트의 총리이신 분이 갑자기 "내가 여러분의 동생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던,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라고 했을 때 형들이 정말 얼마나 놀랐을까? 시기와 질투에 눈먼 나머지, 얄미운 동생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고 나서, 이집트에 먹을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난처한 상황에 빠졌던 순간에는 '그 옛날에 동생을 팔아넘긴 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벌을 받는 것인가'라고 생각할만큼 형들에게도 요셉에 대한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랬는데 그 동생이 내 눈 앞에, 그것도 이집트의 총리로서 서 있다니!!! 그 순간 형들의 마음에 놀라움도 있었겠으나 두려움이 더 크지는 않았을까?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동생에게 나쁜 짓을 했던 과거가 있기에 형들은 이제 동생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놀라고 두려웠을 형들에게 요셉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한다. 

 

(창 45:5) 하지만 이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이 곳에 판 일로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창 45:6) 벌써 이 년 동안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않고 있어요. 더구나 앞으로도 오 년 동안은 심지도 못하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 45: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에요.
(창 45:8) 그러니 저를 이 곳에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의 모든 일을 제가 맡고 있답니다. 저는 모든 이집트 땅의 주인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들의 죄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판 것이 형들이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형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자신을 이집트에 판 일로 마음 아파 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거지?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자신에게 엎드려 빌면서 용서를 구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형들을 위로한다고? 그런데 요셉이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뒤이어 나온다. "하나님께서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셔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게 하신 것이니까요."

 

요셉은 자기 인생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일이, 사사로운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일이라는 것을 고난 가운데 깨달았던 것이다. 멀쩡히 아버지의 총애받는 아들로 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집트의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어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서 지내다가, 인고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파라오의 꿈을 해몽했다가 또 갑자기 이집트의 왕 다음으로 높은 2인자 총리가 되었던, 롤러코스터 같은 요셉의 인생이, 철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서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이 살아 남도록 하려고, 저를 먼저 이 곳에 보내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사람의 관점에서는 요셉이 엄청난 대인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떻게 그런 형들을 용서할 수 있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라고 할 수 있겠으나 더 본질적인 부분을 묵상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라는 깨달음이 주어진다. '어쩌면 내 인생은 이다지도 꼬일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연민하고 상처와 원망 속에 살아왔다면 이런 용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 중에 언제나 자신과 함께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고, 하나님께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왕의 죄수들의 감옥에서, 자신을 높여주시는 것을 보며 이것은 정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과연 인생에 고난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고난 중에 나 자신을 바라보며 연민하고 후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를 더욱 깊이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다.

 

요셉은 분명히 자신을 이 곳,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억울하다 여기면 그 탓을 사람에게 하거나, 하다하다 안되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시고, 고난과 연단의 세월 후에 이집트 왕의 가장 높은 신하로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결코 내 힘, 내 능력으로 올라선 자리가 아님을 그 누구보다 요셉은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요셉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그저 '이상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일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명령하셨다. 

(벧전 1:14) 전에는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악한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벧전 1:15) 여러분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벧전 1:16) 성경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도록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용서를 할 수 있다. 
요셉만 이런 대단한 겸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겸손을 가질 수 있다. 

 

단, 이런 요셉과 같은 용서와 겸손의 모습을 가지려면 요셉이 늘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형통한 삶을 살았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와 겸손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선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용서와 겸손은, 단순히 그의 인생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었기에 더욱 마땅히 있어야 하는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한 순종의 과정이었음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가게 되어 그들의 종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집트를 나오게 될 것을, 아브라함이 아브람이던 시절에 이미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요셉의 용서와 겸손은 개인의 삶의 선택 같아 보이나 사실 요셉 한 사람이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으로 품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성취되는, 놀라운 과정으로 쓰임받았다. 나의 개인의 삶의 순종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키(key), 핵심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들은 거의 다 이루어졌고, 이제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성경에 무수히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면서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말세의 때에, 오늘 나의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는 한 조각으로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이 될지를 생각하여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성취되기를 바라고 주님께 나를 내어드릴 수 있는 거룩한 일에 더욱 도전해야겠다! 

 


 

좋으신 주님,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봅니다. 자꾸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상황에서 이게 어디냐 하는 저의 안일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의 수준으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빚으시고 다듬어주시옵소서! (하지만 너무 아프게는 마시고 ㅠㅠ 제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살살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ㅎㅎㅎ)

 

용서와 겸손은 결코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가운데 용서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것임을 봅니다. 주여, 제 삶의 많은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나고, 그 아는 것이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진짜 삶이 되고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말만 앞서지 않고 마음과 행동이 따라갈 수 있게 성령님 날마다 저를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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