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17장까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람의 생각과 말 VS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창 15:1)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다> 이 일들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창 15:2)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창 15:3) 아브람이 또 말했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지키시며 그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을 주셔도 소용이 없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 종이 나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창 16:1)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인 여종이 있었습니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아이를 갖도록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으니 자기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그러면 그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성경에 흔히 나오는 '사람의 경륜'에 따른 생각과 말이다. 사래도 사람이었기에 지극히 사람다운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창 17:15) <약속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라 라고 하여라.
(창 17:16) 내가 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를 위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다. 또 내가 사라에게 복을 줄 것이니, 사라는 여러 나라의 어머니가 되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사라에게서 나올 것이다.”


(창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사라는 나이가 아흔 살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창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 이라고 하여라. 내가 네 아들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네 아들의 자손과 세울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창 17:20) 네가 이스마엘에 대해 한 말은 내가 다 들었다. 이스마엘에게도 내가 복을 주어, 그에게 많은 자손과 후손이 있게 하며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큰 지도자 열두 명의 아버지가 되고,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창 17:21)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운다. 이삭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쯤 낳을 것이다.”
(창 17: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나누신 뒤에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될 것이라 하시고(창17:5) 많은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하라고 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겠느냐, 사라는 나이가 90살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란다'고 지금 그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실 것이고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까지 소상하게 이미 말씀을 해주신 바가 있다. 

 


(창 15:5)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기에 정말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땅의 관점에서,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 당시의 아브람과 사래의 생각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본다. 

 

사실상 내 생각과 내 말은 하등 필요가 없다. 나는 끽해야 7~80년을 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키락 한 올도 내 마음대로 검게 하거나 희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인데,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내가 정말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고, 무슨 뜻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것을 '듣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은즉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해야하는 것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먼저는 땅에 속한 사람의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할례도 행하고, 이후에 이삭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증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히 6: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히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히 6:15) 아브라함은 인내를 가지고 이 약속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히 6:18)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으시며, 거짓 맹세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는 이 두 사실은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며, 우리가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히 6:19)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내 생각, 내 말을 들이밀지 말자. 내 수준대로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한낱 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열자! 내 생각과 내 말이 앞서기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것에 더욱 매달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요 15:4)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아멘! 참으로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품기보다는 나의 옳다하는 소견을 주님께 들이밀며 '이러면 어떡해요, 저러면 어쩌지요' 하는 자리가 결국에는 불신앙의 자리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회개합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내 말이 앞서지 않도록 제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내 생각으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자리가 없도록 제 생각에도 재갈을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품기 전에 너무나 많은 내 생각으로 온갖 말을 했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성령님이 오셨으니 그 성령님을 더욱 의식하고 더욱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빠르게 하옵소서! 그리해야 내가 살겠나이다! 그리해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겠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서도 자꾸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은 어느날 갑자기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을 선택하신 것인지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향해 복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창 12: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나라와 네 친척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 12:2) 내가 너를 큰 나라로 만들어 주고,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창 12:3) 너에게 복을 주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하겠다.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12장과 13장에는 아브람이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12:8) 그리고 나서 아브람은 세겜에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갔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 장막을 세웠습니다. 서쪽은 벧엘이었고, 동쪽은 아이였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4) 그 곳은 아브람이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18) 그리하여 아브람은 자기 장막을 옮겼습니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큰 나무들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 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서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배격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되게 해달라고 빌면 안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소위 기복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와 Give and Take의 거래를 하는 듯한, 그래서 자꾸 사람 편에서 '하나님이 저한테 이거 해주시면 저도 이거 할께요'라는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복'의 행위를 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복을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복을 구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사실은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더욱 깨닫게 되는 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어떤 점을 보시고 그를 고르셨는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으나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 12: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갈 것에 기꺼이 순종하여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복의 선포와도 같다. 그것은 이미 선포되었으나, 순종하는 자에게서만 성취가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깨닫게 된다. 

 

아직 아브람이 뭘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복을 선포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란 참으로 절대적이며, 일방적이고, 또한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요일 4:19, 쉬운성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롬 5:8, 쉬운성경)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롬 11:29, 개역개정)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Give and Take의 거래 관계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일방적으로, 절대적으로 사랑하셨고, 그냥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 그 부르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아브람을 불러 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절절한 일방적인 사랑도 없다 싶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이후에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서 선포하신 복을 아브람에게 정말로 줄 만하다, 아브람이 정말로 그 복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시며, 당신의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까^^

 

아, 오늘의 묵상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내가 사람의 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정말 엄청나다. 우리가 할 것은 그렇게 먼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화답하며, 나 또한 사랑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 뿐인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을 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의 목적이 아닌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이다. 

 


 

절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을 보면서 이미 그 복이 내게도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고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았듯이 그렇게 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다른 어떤 이유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자체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마땅한 것인데, 자꾸만 이 땅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가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사람인양 생각했던 나의 무지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야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심으로 이미 태초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누리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은 온 세상 가운데 충만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과 복이 가득함에도 늘 나의 문제를 앞세우며 그것이 당장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힘들어하고 우울해하고 괴로워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이미 온 땅 가운데 충만히 선포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으로 나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참으로 좋으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 1:2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그들의 자녀들로 땅을 채우고,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다른 생물들(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창 6:5)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았고, 하나님은 다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창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창 9:2) 땅 위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들을 두려워할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주었다.

(창 9:7) 너희는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에서 번성하여라.”

 

창세기 1장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역시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홍수 심판 이후에 모든 생물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하시며 그 생물들을 사람에게 주었다 하시니 역시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말씀하신대로 사람에게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대홍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구원을 받은 노아의 자녀인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기의 꿈, 자기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창 11:4) 그들이 또 서로 말했습니다. “자, 우리의 성을 세우자. 그리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성...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

우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일관적으로 사람에게 주셨던 명령과 아주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맡기셨는데, 사람은 하늘에 닿고자 했다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땅을 채우고 번성하라 하신 것인데,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대적하는 계획을 도모했던 것이다. 

 

(창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쌓고 있는 성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창 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 백성이고, 그들의 언어도 다 똑같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 일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들은 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창 11:7) 그러니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자.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 11:8)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창 11:9)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그 곳에서 뒤섞어 놓으셨으므로, 그 곳의 이름은 바벨이 되었습니다. 또한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다. 즉,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진짜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그 자리에서 바로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 바벨탑 사건에서 선포된 것이다! 할렐루야!

 

이 바벨탑 사건을 보면 사람의 눈으로는 자기의 계획이 무너지고 자기 꿈이 좌절되고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것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질서대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사실 나에게도 많은 꿈과 계획이 있으나 그것이 100퍼센트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운 것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소망 가운데 여러가지 꿈을 꾸고 계획을 가졌지만 그게 정말 순수한 하나님의 뜻일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나 방법에서 내가 모든 걸음을, 때마다의 선택을, 성령님께 신중하게 물으면서 응답을 받을 때에야 움직여서 여기까지 왔던가?를 생각해보면 '아니, 내 마음대로, 내가 생각했을 때 옳다고 여긴대로, 내가 보기에 좋았던대로' 했던 것이 훨씬 더 많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놓고서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계획했잖아요 라고 하는 나의 말이, 오늘 본문 말씀 앞에서는 참으로 궁색해진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나의 꿈, 나의 계획은 흩어지게 되어있다. 그게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위해서 갖고 있는 나의 꿈이나 계획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인가? 그게 뭐가 문제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철저히 신본주의적인 관점으로 살겠노라 결단한다면 나의 꿈을 꾸고 나의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을 품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해서 그것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벨탑에서 얻는 교훈이다.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 온 세상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제 안에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 경외함이 부족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옳은 소견대로 해왔었는지요. 주여, 용서해주시옵소서! 매일의 소소한 것들 뿐만 아니라 제 삶에서 이루고 싶은 큰 일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여쭙고 하나님의 방법을 듣고 순종하여 이루어가기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해해주실거야 라고 제 임의로 생각하고 제가 하고싶은대로 해왔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범위 안에서는 제가 마음껏 선택하고 결정해도 좋다고 하시겠으나, 이제는 더욱 세세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세밀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고 주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나의 뜻, 나의 계획이 흩어질 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진실로 주님 앞에 겸비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 6:9) <노아와 홍수>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창 6:10) 노아는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함과 야벳이었습니다.

(창 6:11) 이 때에 땅 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고온 땅에는 폭력이 가득 찼습니다.
(창 6:1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타락함을 보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더럽힌 것입니다.

(창 6:13)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서 나는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을 땅과 함께 다 쓸어 버리겠다.
(창 6:14) 너는 잣나무로 배를 만들어라. 그 안에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에 역청을 칠하여라.
(창 6:15) 그 배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규빗 , 너비는 오십 규빗 , 높이는 삼십 규빗 으로 만들어라.
(창 6:16) 지붕 위에서 일 규빗 아래로 사방에 창을 만들고, 배 옆에는 문을 내어라. 배를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삼 층을 만들어라.

(창 6:17) 내가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생물, 곧 목숨이 있는 것은 다 멸망시킬 것이다. 땅 위에 있는 것은 다 숨질 것이다.
(창 6:18) 그러나 내가 너하고는 언약을 세우겠다.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은 모두 배로 들어가거라.
(창 6:19) 그리고 모든 생물을 암컷과 수컷 한 마리씩 배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게 하여라.
(창 6:20)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이 각기 그 종류대로 두 마리씩 너에게로 올 테니, 그것들을 살려 주어라.
(창 6:21) 그리고 먹을 것도 종류대로 다 모아 두어라. 그것을 배 안에 쌓아 두고, 너와 짐승들의 식량으로 삼아라.”

(창 6:22)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함께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바로 베드로후서 2장 5~9절 말씀이다. 

(벧후 2:5) 또한 오래 전,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한 행실을 하던 사람들을 홍수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던 노아와 일곱 식구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벧후 2:6) 그리고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잿더미로 만드시고, 훗날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벧후 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의로운 롯은 그 성의 사람들이 방탕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며 괴로워하였습니다.
(벧후 2:8) 은 선한 사람이었기에 이웃들이 날마다 행하는 악한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벧후 2:9)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야 할지 아시고, 큰 어려움이 닥칠 때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심판날까지 계속 벌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6:9~22와 베드로후서 2:5~9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는 딱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노아와 같은 사람 - 그가 사는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구원받음 / 자기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함)
  • 과 같은 사람 - 이웃들이 행하는 악한 일들을 보고 들으며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 소돔과 고모라(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악함을 괴로워만! 하는 사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뱉어버림을 당할 수 있는 사람 (구원 못 받음 / 자기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망하는 길로 인도함)
  • 멸망 당하는 사람 - 타락하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사람 (구원 못 받음 / 심판날까지 계속 벌을 받음

혹자는 이 분류를 볼 때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내내 하나님을 향한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돼',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돼'라고 하는 것일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구원의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셨다. 

(개역개정,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쉬운성경,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마 7:14)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나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노아의 당시에 땅 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고, 온 땅에는 폭력이 가득했던 것이 정말로 지금의 시대, 곧 말세에 날마다 더욱 가까워지는 이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심판 또한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했던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고 인도해주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롯과 같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은 가졌으나 그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세상과 영합한 삶을 산 자에게는 결국 딸들이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며 자식을 낳게 되고 그 자식들이 후에,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압과 암몬 백성이 되는 저주가 임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성경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신앙생활의 깊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노아와 같이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고 싶어지고, 세상으로부터는 구별되고 싶고, 하나님께서 비밀을 나누어주시는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를 향해 세상은 마른 땅에서 배를 만드는 미친 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노아처럼 세상이 무어라 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결단한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가 무엇을 해야할지 세세하게 알려주신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정신없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속상해하고 두려워하는 롯처럼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떠하든 이 세상의 최종 권위가 하나님께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결국에는 심판하실 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산다면 그는 노아와 같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가족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받게 되는 것이다. 
 
기억하자! 세상은 극단적인 믿음이라 말할지라도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고 흠없이 살아가는 극단적인 신앙이 아니고서는 이 말세의 때에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 세상의 어떠함을 보며 울분을 터트리고, 세상을 한탄하는 것이 옳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갈수록 더욱 악으로 치닫고 타락할 것은 이미 성경에 내내 예언되었던 것인데도 그 세상을 바라보며 괴로워만 하고 있다가는 롯과 같이 멸망하게 될 것을 알게 하시니, 이제는 자꾸만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세상을 누리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것을 결단합니다! 
 
주여, 더욱 예수에 미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무어라 하든 좁은 문, 협착하지만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 안에 자꾸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자리, 세상을 누리려는 자리가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고,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성령님께서 부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저를 살리시기 위해 오늘의 이 말씀도 주셨음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One way to Jesus! 오직 한 길로만 나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3장 14~24절을 보면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온 후에 하나님께서는 뱀, 하와, 아담 각자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심을 알 수 있다. 

 

뱀이 받은 저주

  •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음
  • 평생토록 흙먼지를 먹고 살아야 할 것
  • 여자와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될 것

(창 3:14)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했으므로, 너는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배로 기어다니고, 평생토록 흙먼지를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창 3:15) 내가 너와 여자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하와(여자)가 받은 저주

  • 아기를 가지는 고통이 클 것이며,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
  • 남편을 지배하고자 하나,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게 될 것

(창 3:16)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기를 가지는 고통을 크게 하고, 너는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아담(남자)가 받은 저주

  • 아담(남자)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평생토록 수고해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
  •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

(창 3: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러므로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너는 밭의 채소를 먹을 것이다.
(창 3:19) 너는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네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시고, 각각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은 분명하고, 정확하며, '그냥 없던 것으로 쳐줄께' 하는 자체가 불가하신 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내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는 것을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은!

진정한 본질적인 대책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마련하시고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창 3:2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온 근원인 땅을 열심히 갈게 하셨습니다.
(창 3:24)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쫓아 내신 뒤에 에덴 동산 동쪽에 천사들을 세우시고 사방을 돌며 칼날같이 타오르는 불꽃을 두시고,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저지른 죄(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음에도 그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태초부터 존재했던 어둠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린 것)로 인해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리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벌거벗었다는 것에 눈이 밝아져 두려움으로 숨었다. 그것이 그들 깜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죄의 대속'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수습할 수 있는 '온전한 방법'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1. 동물 가죽(예수님의 예표)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고 
  2.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된 채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막고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3. 에덴동산 동쪽에 천사들을 세우시고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불꽃을 두시고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 

즉, 세상을 '질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온전하고도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신 사랑'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다. 

 

사람은 항상 본인의 죄로 인해 댓가를 치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와가 뱀의 탓을, 아담이 하와의 탓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혹은 죄의 댓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너무 심하지 않느냐?'라고 내가 치르는 댓가가 너무 크다고 항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한 것에 대한 댓가는 분명히 치르게 하시는, 셈에 능하시고 정확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온 우주가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질서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감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선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의이기 때문에(시 89:14) 하나님으로서는 죄를 지은 장본인들이 치러야 할 댓가를 치르게 하시지만 본질적인 대속, 즉 죄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죄의 저주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본질적인 대속의 방법에 대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사람이) 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더욱 크고, 위대하고, 놀랍고, 사랑 그 자체이신 대책을 갖고 계시며,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그것이 알파요,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내가 감당한다고 여기는 정도는 말 그대로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질서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영역에서 본질적인 일을 이루시는 분인 것이다. 그것이 진실로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신,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이다. 그것에 감격하고 그것에 감사하자!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가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깨닫지 못하는 영역에서 나를 책임지시고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순간 순간 망각하고 내 입장만 하나님께 토로했던 어리석고 못난 저를 용서해주세요. 

 

내 죄로 인한 댓가치름의 기간을 억울하다 여기지 말고, 본질적인 해결방안을 이미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며 내 편에서 해야하는 순종을 주께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대책은 주님께 있습니다. 해결은 주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좋으신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고 자꾸만 내 스스로 아등바등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고아의 영성을 버립니다! 철저히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기 1:28, 쉬운성경)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아담에게 이끌고 가셔서, 아담이 그것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를 보셨습니다.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어 부르면, 그것이 곧 그것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2:19, 쉬운성경)


1)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는 것, 땅을 정복하는 것,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2)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던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어 부르면 그것이 곧 그것들의 이름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된, 죄를 범하기 전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죄에서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의 존재의 본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8, 쉬운성경)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8, 개역개정)

즉, 사람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이것이 사람의 존재적인 본분인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모습을 보자. 세상의 난리 소문과 재정의 불안함과 미래에 대한 염려로 걱정과 근심이 있고, 위축되고 두려워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 않는가?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서의 본 모습을 잃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된다.

 


 

주여, 존재적으로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스리는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세상 속에서, 상황과 환경 앞에서 위축되고 두려워질 때가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자꾸만 상황과 환경 앞에서 두려워질 때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본분을 기억하겠습니다! 위축되고 근심되고 염려될 때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하겠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의 영혼이 주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을 수 있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놓습니다!

 

주님, 나의 연약함을 자꾸만 허용하고 타협하려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받았던 나의 본 모습을 기억하며 그것이 현실 속의 나보다 오히려 더 영적이고 실제적인 실체임을 더욱 선포하겠사오니 성령님, 저를 도와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다스림받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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