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독일지의 본문은 창세기 31~33장 말씀인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해보고자 한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이 맏아들 에서인 것처럼 속여 맏아들의 축복을 받은 후,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 부모의 말을 따라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20여년을 머물며 많은 연단 끝에 외삼촌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들의 몸종 빌하와 실바까지 더하여 총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네 조상들이 사는 땅으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창31:3)라는 말씀을 듣고 온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사는 자기 아버지 이삭을 향해 떠났다(창31:18).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형 에서였다. 20년 전에도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데, 아직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는 이 때에 다시 형을 만난들 형이 자신을 무사히 둘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그는 에서를 만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야곱의 인생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형 에서가 자신을 용서해주어야 해결될 문제였기에) 그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창 32:9) 야곱이 말했습니다.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네 나라,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네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32:10)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온갖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처음 요단 강을 건넜을 때, 저에게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재산을 둘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창 32:11) 제발 저를 제 형 에서로부터 구해 주십시오. 에서가 와서 저와 아이들의 어머니와 아이들까지 해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32:12)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겠다. 내가 네 자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은 정확히 자신이 찾는 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냥 막연한 이방 우상이 아니라 본인이 벧엘에서 만났던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붙들고 간절하게 간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후에 그는 어떤 사람(하나님)과 씨름하게 되었고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이 부분을 주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것을 우리는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말씀) 안에 있고, 말씀(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하셨고, 의심없이 믿을 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막 11:23)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을 향하여 ‘뽑혀서 바다에 던져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속에 아무 의심 없이 말한 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한 모든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자!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약속을 상기시켜 드리며 기도하자! 그럴 때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못하실 것이다^^

 

(창 32:22) 그 날 밤, 야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얍복 강 나루를 건넜습니다.
(창 32:23) 야곱은 자기의 가족 모두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창 32:24) 그리고 자신은 홀로 뒤에 남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
(창 32:25)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엉덩이뼈를 어긋나게 만들었습니다.
(창 32:26)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지만 야곱이 말했습니다. “저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창 32:27)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야곱입니다.”
(창 32:28)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다.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고, 사람과도 씨름을 해서 이겼기 때문이다.”
(창 32:29) 야곱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며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창 32:30) 그래서 야곱은 그 곳을 브니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
(창 32:31) 야곱이 그 곳을 떠나려 할 때에 해가 떠올랐습니다. 야곱은 엉덩이 때문에 다리를 절뚝거렸습니다.
(창 32:32) 브니엘에서 나타난 사람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엉덩이뼈에 붙어 있는 큰 힘줄을 먹지 않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에서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했던 그 날 밤, 어떤 사람이 와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다. 성경은 그가 사실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곱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을 붙들었는지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어긋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저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보내 드릴 수 없다"고 끝까지 매달린다. 이처럼 야곱이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만큼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이야말로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씨름했고, 사람과도 씨름을 해서 이겼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이 죽고, 성령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연상된다.

 

야곱은 도무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 자체가 먼저 변화되게 해주셨고, 야곱 역시 더 이상 문제 해결에 매몰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애 3: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 인생 가운데 고생과 근심케 할 일들을 허락하신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회개할 것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인 것이다. 

 

야곱은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옛사람(야곱)은 죽었고 그의 영혼은 새 사람(이스라엘)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그 날, 나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주권을 가진 이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었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결국 '나'라는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것을 알고 인정하고 진실로 믿는다면 끝까지, 기도의 응답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였은즉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는 간절함과 끈질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야곱처럼! 말이다. 

 


 

주여, 인간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의 이토록 연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람을 용서해주시고 고난이 있어야만 주를 찾는 어리석음이 없게 하옵소서! 평안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으로 충천하게 하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마음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주의 종이 될 수 있도록 변화되게 하옵소서, 성숙해지게 하옵소서! 

 

매일의 삶이 더욱 나를 연단하시는 주님 앞에 성실하고 합당한 훈련의 시간으로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그저 이 고난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신 상황과 환경 안에서 나의 어떤 면이 변화되고 단련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을 이루는 하루가 되도록 더욱 깨어있게 하시고 매 순간의 삶에 집중되게 하옵소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리석게 스스로의 선택으로 고난의 기간만 연장시키는 내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고난의 목적을 이루기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그렇게 나도 늘 새롭게 거듭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일지 본문 중에서 성령님께서 주목하여 보게 하신 부분은 너무나도 유명한 "벧엘에서 꿈을 꾼 야곱"의 이야기다. 

 

(창 28:10)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창 28:11)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야곱은 그 곳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야곱은 그 곳에서 돌 하나를 주워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화를 피해, 아버지 이삭이 밧단아람에 있는 외할아버지 브두엘의 집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이었다. 야곱이 어딘지도 모르는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야곱은 그냥 밤이 되어 돌 하나를 주워 베개로 삼고 잠을 청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특별할 것이 하나 없는 그냥 일상의 모습이다. 

 

(창 28:12)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다리 하나가 땅에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창 28:13) 야곱은 여호와께서 사다리 위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네가 지금 자고 있는 땅을 줄 것이다.
(창 28:14) 네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지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창 28:15)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을 꾸게 하셨다. 그것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의 꿈이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야곱은 꿈에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야곱은 사다리 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과도 같다. 

 

(요 1:50)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해서 나를 믿느냐? 그러나 너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 1:51)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결국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통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될 그 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성령이 오셨을 때 이루어질 것을 연상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한 인간인 야곱에게 이토록 일찌감치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에 하나님의 역사를 스스로 이루실텐데 마치 그날이 이르러서 '내가 이렇게 할거라고 미리 얘기해주었지?'라며 하나님의 사람에게 증표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야곱의 하룻밤이, 그의 개인적인 삶의 순간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맞닿게 된 것이다. 마치 그것이 씨줄(개인의 삶의 순간)과 날줄(하나님의 역사)처럼 엮여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수레바퀴가 도는 듯 하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의 증거를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기도 중의 감동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누실만한 증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깨끗해야 함을 다시 새기게 된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 또한 있습니다. 그 그릇 가운데 특별히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평범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딤후 2:21) 만약 누구든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인이신 주님이 쓰기에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야곱에게 주셨다. 이미 선대에 약속해주신 것이었기에 후대에 이루어질 것이 확정적이나(물론 후대가 그 약속을 도저히 받지 못할 수준일 때는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경우도 성경에 있기는 하다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도 다시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대일로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을 새겨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리니,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창 28:16) 그 때에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창 28:17) 야곱은 두려워하며 또 말했습니다. “이 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
(창 28:18)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창 28:19) 원래 그 성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은 그 성의 이름을 벧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창 28:20) 야곱은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하여 주시고, 이 여행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창 28:21) 무사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여호와를 저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창 28:22) 내가 기둥처럼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마치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히 온 세상 가운데 편만한데도 우리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순간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다. 

 

야곱은 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이 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 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차원의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곧 경외함의 차원에서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곱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베개로 삼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우고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은 그 성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이 있는데, 거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가 이 땅에 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야곱은 그렇게 하나님과 개인적인 언약의 관계를 맺고 순종을 다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받아야만, 즉 Give and Take의 관계가 되어야만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일대일의 언약적 관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성품을 따라 자비와 긍휼, 은혜와 사랑을 사람에게 베풀어주시고(위에서 아래로), 사람은 그런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아래에서 위로)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으로 하는 것이며 그것에는 우리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시간으로, 재정으로, 헌신으로 섬기는 것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오늘 야곱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십분의 일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하며 그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헌신이 뒤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 오늘도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꿈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 꿈을 받고, 언약을 받고, 어떻게 반응하며 나아갈지는 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룰 통로를 정하신다는 것을 보게 해주시니 감사드리며, 더욱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을만한 깨끗하고 성결한 그릇으로 내가 거듭나게 하옵소서! 내 안에 더러운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거룩하시고 빛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의 더러움과 흠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여, 용서해주시고 자꾸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연약함을 주의 말씀으로 타파하고,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집중력이 내게 있게 하옵소서! 

 

(히 10: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결코 뒤로 가는 자가 되지 않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자가 되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본향을 향해, 위에 것에 마음을 두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도우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의 본문인 창세기 25~27장을 읽었을 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창 25:21) 이삭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드리니, 여호와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 25:22)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리브가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며 여호와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 관한 뜻을 정하신 바가 있었다. 

 

이게 예정론의 문제로 가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정해두셨는데, 사람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며 복음을 전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해두셨으니까!) 라는 요상한 문제로 풀어질 수 있어서 다소 조심스러우나 그냥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신앙생활을 해온 약 25여년의 시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십차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아주 소중한 진리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바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뜻과도 같다. 그래서 역사는 History = His(God's) Story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말까지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결코 숨기지 않고 성경에 모두 기록해두셨다. 그 성경을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열리지 않고 풀리지 않고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 의지하여 구약과 신약을 통전적으로 바라보고 성령님께 깨달음을 구하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진실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만한 자들에게는 찾을 수 있도록 다 기록해두셨고 가르쳐주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두 아이를 향하신 뜻을 정해두셨다. 왜 그래야 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실 권한이 있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인본주의적인 교육을 오래 받게 되면 여기에서부터 반발심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해두셨고 그것에 따라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 같고 나의 의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그 계획대로 이루신다는 것에서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 대전제가 없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배운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 사람의 눈에 고통이고, 고난이고,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인 경우가 많으나 어쨌든 그것을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역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도 조금이나마 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던 두 아이, 에서와 야곱에 관한 뜻을 가지고 있으셨다. 이것은 로마서 말씀에도 설명이 되어있다. 

 

(롬 9:10)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롬 9: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롬 9:12) 리브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불러 주시는 분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롬 9:13) 이것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롬 9: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정하지 못하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자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9:16) 그러므로 모든 것이 사람의 요구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는 목적을 굳게 세우기 위해 에서와 야곱을 향해 다른 뜻을 가지고 계셨다. 

 

(롬 9:17)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것은 너를 통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두루 전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롬 9: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만드십니다.
(롬 9:19) 그러면 여러분 중에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롬 9: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꾸한단 말입니까? 토기그릇이 자기를 만든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롬 9:21) 토기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진흙으로 귀하게 사용할 그릇과 천하게 사용할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단 말입니까?
(롬 9:22)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시고 그분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면서도 멸망받기로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인내로써 참아 주셨다면 어쩌겠습니까?
(롬 9:23)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영광에 들어가도록 미리 준비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분의 풍성한 영광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쩌겠습니까?


결국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토기장이가 필요에 따라 그릇을 만들듯이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실 권한이 있다. 다만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는 내가 어떤 그릇인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다 알 수가 없기에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바대로 순종의 그릇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도 순종의 그릇으로 (아마) 예정되어 있는 것을 이 땅에서 증명할 수 있을 것이요, 반대로 성경이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로마서 1장 말씀처럼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두셨음에도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은 그 자체로(그 선택 자체가) 어찌보면 결국에는 구원받지 못할 자였다는 것을 스스로가 증명하는 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역시 오늘날 우리는 후대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구나를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들의 삶의 순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내내 나오지만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시고 알려주지 않으려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들, 의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해주셨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오늘 본문에 리브가에게도 하나님은 다 말씀해주셨다. (오늘날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 말씀해주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늘 자기 옳은 소견대로,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일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다 말씀해주셨다. 

 

만약 리브가가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 두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묻고 구했다면 결과는 동일했었을지라도 과정은 좀 다르지 않았을까? 에서와 야곱 역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말씀을 사람의 관점에서 '이게 무슨 차별이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의 뜻보다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쭤보고 하나하나 순종하면서 나아갔다면 에서도, 야곱도 인생을 그렇게 고달프게 살 필요가 없지는 않았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리브가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적용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에서의 잘못은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창25:34), 야곱의 잘못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꾀와 속임수로 일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랬기 때문에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자신이 죽기까지 야곱을 다시 보지 못했으며(스스로 그 저주를 받겠노라 하였음 - 창27:13), 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야곱을 미워하는 증오심 속에 괴로운 삶을 살았고, 야곱은 에서보다 더한 외삼촌 라반을 만나 엄청난 연단의 시간을 거치고 에서를 두려워 하는 마음 속에서 항상 살아야만 했다. 물론 이삭도 눈이 어두워지고 사리분별이 흐려지면서 에서와 야곱을 분간하지 못한 실수 가운데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선포하고 에서에게는 줄 복이 없게 만든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실수 또한 크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된 것이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은 있으시겠으나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택과 순종의 자리를 허용하시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까지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 인해 얼마나 인생이 꼬일 수 있는지(하나님의 역사는 그 뜻대로 흘러가지만) 여실하게 보여주시며 후대에게 교훈을 삼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통로삼아 당신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오늘날 참으로 세상이 혼란스럽고 더욱 악으로 치닫는 것 같아 마음을 어려울 때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사고 앞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느냐, 왜 이런 것을 내버려두시느냐 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더더더 악이 관영해질 것이라고 하셨으며 이 세상은 결국 멸망으로 갈 것이라고 이미 성경에 기록하시고 다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이미 예비해두셨고 이 땅은 그 악이 가득해질 때 결국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미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심판받게 될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골 3: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골 3:2)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골 3:3) 옛 사람은 죽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골 3:4) 여러분 모두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골 3:5)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죄악된 것은 다 버리십시오. 성적인 죄, 악한 행동, 나쁜 생각, 지나친 욕심 등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골 3:6)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골 3:7) 여러분이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했을지 모릅니다.
(골 3:8)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몰아 내려고 힘쓰십시오. 분한 생각, 화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 선하지 못한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골 3:9)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골 3:10)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뜻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보고 안다고 하면서도 정말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을 믿지 않고 나의 옳은 소견 가운데 죄로 나아갔던 것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미 나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나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나는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의 그릇으로, 의의 도구로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삶에 대해 내 생각을 따라 짐지고 있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자리에 기꺼이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6) 성적인 죄를 범하지 말며, 에서처럼 하나님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하십시오. 에서는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었지만, 한 그릇의 먹을 것을 위하여 맏아들의 특권을 팔고 말았습니다.
(히 12: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서는 그후에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울면서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으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멘! 내 안에 자꾸만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곧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장자의 명분을 파는 죄악이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정신차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정독은 창세기 22~24장이었는데 성령님께서 각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에 대해 주목해서 보게 하셨다. '여호와 이레'의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한 본문이라 내 생각이 마구 마구 솟아올랐다.

그렇지,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단한 믿음을 가졌지

자기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다니 정말 엄청난 순종이야

역시 믿음의 아버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할 수 있어야지

이런 믿음을 드려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데, 아 나는 뭐지?

이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아가려는 순간!

아차! 묵상은 이렇게 하는게 아니지, 내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성경을 풀어달라고 구해야 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성령님이 멈추게 해주셨다, 감사합니다!) 

다시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잠잠히 구했다. 

 

그랬더니 나의 온갖 잡생각이 사라지고, 갑자기 나의 시선이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동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시선! 그 마음이 나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 22:1) 이 일들이 있은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창세기 22장의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닥뜨릴 때,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거 보시니 퍽이나 좋으십니까?"라고 하늘에다 삿대질을 하는 듯한 마음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절대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의 인생에 무엇인가를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다. 설혹 그것이 시작부터 나의 죄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찾고 구할 기회를 주시고, 그 영혼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붙든다면 그의 인생이 새로 태어나게 도와주시는 좋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자 그를 부르신 것 자체가 아무 뜻 없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조물주가 장난치듯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새겨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라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볼 때, 온 땅을 두루 감찰하다가 자신을 향하여 귀기울이고 있는 영혼을 부를 때 그가 즉각 답을 한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얼마나 기쁠까? 그(아브라함)가 나(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마음이 열려있고, 또한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내가 창조한 피조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실 것 같다.(이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태도를 볼 때에도 계속 연결되는 마음이다.)

 

(창 2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네 아들을 잡아,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한 다음에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실로 엄청난 말씀을 하셨다.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통로인 그 아들을 태워 드리는 제물로 바치라니!!! 그런데  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것을 이룰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으로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하고 번제물이 될 아들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브라함은 흔하디 흔한 사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삭을 바치라니요? 이삭이 어떤 아들인지 하나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럴리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많은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이미 약속하셨는데요? 제가 잘못 들은거겠지요

말도 안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어떻게 죽입니까? 하나님, 그렇게 잔인한 분이셨나요?

등등등

 

사람이라면 충분히 할법한 소리를,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이럴까? 저럴까? 설마 그럴까? 사람의 생각으로 왔다 갔다 분분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도 않고 즉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래, 그래! 잘 한다! 바로 그거다!
이제 앞으로는 쭉 내가 말한대로만 해라. 그 길로 너는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통과해내기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을까? 

 

(창 22:4) 삼 일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멀리에 그 곳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모리아 땅으로 가기까지는 무려 3일이나 걸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즉각 길을 떠났지만 그곳에 당도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길을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가야할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도중에서 포기하는가?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과정 중에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 곳에 도착해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는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과정이 결론은 아닌 것이다. 결론은 거기까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우리의 목표가 본향인 천국인 것처럼!!!)

 

3일이나 걸린다 하더라도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아브라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길을 떠난 아브라함이었기에, 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할 수 있도록,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내 아들아, 내 딸아, 잘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이제 다 와간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라.
이 길의 끝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외치며 우리를 안아주시려고 두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창 22:5) 아브라함이 자기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나귀와 함께 이 곳에 머물러 있어라. 내 아들과 나는 저쪽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겠다.”
(창 22:6) 아브라함은 태워 드리는 제사인 번제에 쓸 장작을 자기 아들에게 지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챙긴 후, 아들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창 22:7)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
(창 22:8)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들은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이 장면이 가장 마음 아프고 힘든 장면일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설교들이 이 당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상상해서 '매우 인간적인 고뇌'가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었을 것 같이 묘사한다. 그러나 이 장면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가는 이 길에서 고통스러워 하거나 괴로워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삭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는 전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에게 지게 했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후에 부지런히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삭이 보기에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이 보이지 않아 천진난만하게  그 양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참으로 지혜롭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가리운 채 "하나님께서 번제로 바칠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계속 묵묵히 아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갔다. 

 

이것에 대해 당시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는데도 아들을 바칠 준비를 한 것입니다.
(히 11:1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네게 약속한 후손은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 11: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살려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 하셨으나 거기에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하고자 불과 칼을 챙겨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에게 약속한 후손이 이삭을 통해 나올 것'이라고 하셨는데도 이삭을 죽이라 하시는 것은 "아!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구나!"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당시에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도, 그가 실제로 본 적도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고자 데리고 갔을 때, 그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 네가 나를 알아주는구나!
네가 나의 선한 뜻을 아는구나.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 내가 몹시 기쁘다.
나의 능력을 알아주니 내가 너의 믿음대로 다 보여주고 싶구나!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주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알아주고,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드린다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매우 기쁘시지 않을까? 

 

(창 22:9)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창 22:10) 그리고 나서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창 22:11)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러자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창 22:12)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노라.”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나무에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대신에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창 22:14) 이 일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당도했다. 그는 그 곳에서도 지체하지 않고 그 곳에 온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기껏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목적지까지 다 와서 자신의 의를 드러낸다거나 다른 엉뚱한데로 새지 않고 그는 원래 그 목적지까지 온 이유를 확실하게 하며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다. 

 

그랬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불러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그를 말렸다. 그러면서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을 때 나무에 뿔이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보았고, 그는 비로소 '이 숫양을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숫양을 잡아다가 자기 아들 이삭 대신에 번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 =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창 22:15) 여호와의 천사가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창 22:16) 천사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바치려 했으므로, 맹세코 내가 너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겠노라.
(창 22:17) 내가 분명히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많은 자손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며, 네 자손은 원수의 성들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창 22: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므로, 네 자손을 통해 땅 위의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천사는 두 번째로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려 했기에,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새겨주셨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 이미 하셨던 약속에 대한 보증에 보증을 거쳐 주신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보증해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여기서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여정을 통해 아들 이삭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순종을 드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실로 체험했다. 즉, 내가 죽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만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었으리라! 아직 그의 눈 앞에는 당도하지 않은 후손대의 일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 숫양을 준비해두신 것처럼 앞으로의 일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도하시며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브라함 안에 더욱 확고해졌을 것 같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 아브라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래, 자랑스럽다 나의 아들아! 내가 이 상을 주기 위해 너를 이 곳으로 불렀노라. 
네가 순종하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못 받았을 이 상이,
이제 진실로 가야 할 자리를 찾아갔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온 땅을 두루 살피며 나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너를,
내가 창조한 것이 진실로 기쁘다. 
내가 마련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여라.
너의 누림이 곧 나의 기쁨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시험을 멋지게 통과해냈을 때 하나님은, 자기가 한 것보다 자녀가 한 것을 더욱 기뻐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뻐하지 않으셨을까?

 

(마 25:31)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마 25:32) 그 때에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모일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가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마 25:33) 인자는 자신의 오른쪽에는 양을, 왼쪽에는 염소를 둘 것이다.
(마 25:34) 그 때 왕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너희들이여, 와서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아라.
(마 25:35) 내가 배가 고플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마 25:36)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는 내게 옷을 입혀 주었다. 내가 아플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가 당신께서 주실만한 복을 받을만한 깨끗한 그릇이 되어주기를, 그래서 마음껏 붓고 붓고 또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요10:10)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목적은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기를 원하시는, 정말로 좋고도 선하신 것이다. 

 


 

(약 1:12) 시험을 받은 후, 더 강건해졌다면 복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멘아멘! 하나님께서 인생 가운데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은 나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에서 나의 믿음을 증명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에게 상을 주시려고 모든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니 지금 내게 닥친 고난과 시련을 바라보지 않고 그 너머에서 상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시는 좋으신 분임을 알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임을, 선하신 분임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도 순간 순간 인생에 닥친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고 요동했던 모든 불신앙의 순간들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주님께서 나에게 순종하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을 진실로 순종하는 행함으로 나아갈 때 상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미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롯에 관해서는 아브라함에 비하면 짧게 서술되어 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롯에 대해 집중케 하심이 있어서 롯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려주셨다. 

(창 18: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빌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8)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8:19)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한 모든 약속을 지키겠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 백성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너무나 악하다.
(창 18: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정말로 그토록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해주셨다. 


(창 18:22) 그리하여 세 사람은 그 곳을 떠나 소돔 쪽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창 18:23) 아브라함이 주께 다가가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착한 사람들도 저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창 18:24) 만약 저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 성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저 안에 살고 있는 착한 사람 오십 명을 위해 저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창 18:25) 제발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의인이나 악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온 땅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니 옳은 판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천사가 소돔 쪽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여호와 앞에 서서 하나님께 그 성에 의인이 있는데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실 것이냐고 물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주여, 노하지 마시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해 주십시오. 만약 열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열 명만 있어도, 저 성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결국에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 ㅠㅠ)

 

창세기 19장에서 두 천사가 소돔을 살피러 갔다가 그들의 악함에,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을 결정하셨다는 것을 롯에게 알려준다. 

 

(창 19:13) 우리는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이 성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에 대해 모두 들으셨소.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망시키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오.”

(창 19:15) 이튿날 새벽이 되자, 천사들이 롯에게 빨리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둘러 여기 있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나가시오. 죄악으로 인해 이 성에 심판이 임할 때에 당신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창 19:16) 그래도 롯이 머뭇거리자, 그 사람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창 19:17) 두 사람은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살려면 이 곳을 피해야 하오.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마시오. 산으로 도망가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죽을 것이오.”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임박한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나, 롯은 그 당시에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끌고 성 밖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기까지 해주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성경에도 기록이 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면서 천사는 골짜기 어디에서든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말라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를 해주었다. 

 

(창 19:18) 그러자 롯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제발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창 19:19) 주께서는 주의 종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산까지 달려갈 수 없습니다.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저도 죽을까 두렵습니다.
(창 19:20) 보십시오. 저기 보이는 저 성은 도망가기에 가깝고도 작은 성입니다. 그러니 저 성으로 도망가게 해 주십시오. 저 성은 참으로 작지 않습니까? 저 성으로 도망가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창 19:21) 천사가 롯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일에도 내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당신이 말한 저 성은 멸망시키지 않겠소.
(창 19:22) 하지만 빨리 도망가시오. 당신이 저 성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 없소.” 그러므로 그 때부터 그 성은 ‘작다’는 뜻으로 소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신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감사함으로 소돔을 기꺼이 떠나 산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이르기도 전에 재앙이 닥쳐서 죽을까봐 두렵다"라고 하며 본인이 생각했던 적당한 거리의 소알 성으로 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천사는 그런 그의 그 부탁까지도 들어주었고,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했다.

 

(창 19:29) 하나님께서 골짜기의 성들을 멸망시키셨지만 아브라함의 부탁을 기억하셔서, 롯이 살던 성을 멸망시키실 때에 롯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중보) 덕분에, 정말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을 입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소돔을 떠날 것을 머뭇거렸으며, 소돔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으로 가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가 보기에 적당한 소알 성에서 머무르기를 원하였다. 

(창 19:30) <롯과 그의 딸들> 롯은 소알에서 계속 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두 딸은 산으로 이사했습니다. 롯은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소알에 살면서도 계속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안전하다고 여긴 산으로 이사했고 딸들과 함께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고 결국 그 동굴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악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딸들이 "세상 사람들이 다 결혼하는데 우리와 결혼할 남자가 없으니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하여 잠자리를 갖고 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갖자"라는 몹쓸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다. 

 

롯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 하란을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구경꾼마냥 자기의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14장에서 롯이 소돔에 살다가 왕들의 전쟁 가운데 붙잡혀 갔을 때도 아브라함이 구출해주었고,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소돔에서 도망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롯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브라함의 도움은 받았으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롯이 계속해서 구원의 길에서 머뭇거리고, 적당한 곳에서 타협하고, 소돔이 멸망한 것을 보고서도 자신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보다 계속해서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두려움' 가운데서 살았다는 것을 볼 때 요한일서 4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요일 4:1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요일 4:18)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롯과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아 알면서도, 계속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죄 가운데 계속해서 머무르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롯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덕분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각각 서는 것이기에, 나의 최종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기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또한 중보기도의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하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국 내가 행한 것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임을 두렵고 떨림으로 다시 새겨야겠다.  

(전 12:14) 하나님은 선악간의 모든 행위와 남몰래 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히 9:27) 사람들은 모두 한 번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내 안에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임을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롯과 같이 적당히 타협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내 안에서 소멸되도록 더욱 진리의 빛을 밝혀주사 진리를 알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겸손한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보고 죄에서 떠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더 이상 롯과 같이 세상에서 머뭇거리며 세상의 어떠함을 괴로워하고 두려워 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선포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5~17장까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사람의 생각과 말 VS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알 수 있다. 

(창 15:1)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다> 이 일들이 있은 후에 여호와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네 방패이다. 내가 너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창 15:2) 그러자 아브람이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다마스커스 사람인 제 종 엘리에셀이 제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창 15:3) 아브람이 또 말했습니다. “주께서 저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으니, 제 집에서 태어난 종이 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지키시며 그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을 주셔도 소용이 없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내 종이 나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창 16:1) <하갈과 이스마엘>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고 하는 이집트인 여종이 있었습니다.
(창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아이를 갖도록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하십시오. 하갈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으니 자기의 여종과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그러면 그의 몸을 빌려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성경에 흔히 나오는 '사람의 경륜'에 따른 생각과 말이다. 사래도 사람이었기에 지극히 사람다운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창 17:15) <약속의 아들 이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부터는 사라 라고 하여라.
(창 17:16) 내가 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를 위해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다. 또 내가 사라에게 복을 줄 것이니, 사라는 여러 나라의 어머니가 되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사라에게서 나올 것이다.”


(창 17: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백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사라는 나이가 아흔 살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을까?”
(창 17:18)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창 17:1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이삭 이라고 하여라. 내가 네 아들과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네 아들의 자손과 세울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창 17:20) 네가 이스마엘에 대해 한 말은 내가 다 들었다. 이스마엘에게도 내가 복을 주어, 그에게 많은 자손과 후손이 있게 하며 번성하게 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큰 지도자 열두 명의 아버지가 되고,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창 17:21) 그러나 나는 내 언약을 이삭과 세운다. 이삭은 사라가 내년 이맘때쯤 낳을 것이다.”
(창 17: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나누신 뒤에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될 것이라 하시고(창17:5) 많은 자손을 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하라고 하시며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내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기를 낳을 수 있겠느냐, 사라는 나이가 90살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느냐며 마음으로 혼잣말을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 복을 받으며 살기를 바란다'고 지금 그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주실 것이고 그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까지 소상하게 이미 말씀을 해주신 바가 있다. 

 


(창 15:5)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창 15:1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알아 두어라. 네 자손은 나그네가 되어 낯선 땅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그 땅의 사람들이 네 자손을 종으로 삼고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창 15:14) 그러나 네 자손을 종으로 삼은 그 나라에 내가 벌을 주리니, 네 자손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창 15:15) 아브람아, 너는 오래 살다가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다.
(창 15:16) 네 자손은 손자의 손자 때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텐데, 이것은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은 벌을 받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55: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기에 정말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심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땅의 관점에서,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문제들을 대하는 태도도 이 당시의 아브람과 사래의 생각과 말과 크게 다르지 않는 자리가 있음을 본다. 

 

사실상 내 생각과 내 말은 하등 필요가 없다. 나는 끽해야 7~80년을 살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부족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머리키락 한 올도 내 마음대로 검게 하거나 희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인데,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내가 정말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시고, 무슨 뜻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것을 '듣는 것'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은즉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해야하는 것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그가 먼저는 땅에 속한 사람의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할례도 행하고, 이후에 이삭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증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히 6: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그에게 맹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히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히 6:15) 아브라함은 인내를 가지고 이 약속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히 6:18)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으로 약속하지 않으시며, 거짓 맹세도 하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는 이 두 사실은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며, 우리가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히 6:19)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튼튼하여, 그 소망을 통해 하늘 지성소의 커튼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내 생각, 내 말을 들이밀지 말자. 내 수준대로 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한낱 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열자! 내 생각과 내 말이 앞서기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무엇인지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것에 더욱 매달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요 15:4)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 15: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아멘! 참으로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품기보다는 나의 옳다하는 소견을 주님께 들이밀며 '이러면 어떡해요, 저러면 어쩌지요' 하는 자리가 결국에는 불신앙의 자리임을 깨닫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회개합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내 말이 앞서지 않도록 제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내 생각으로 이러고 저러고 하는 자리가 없도록 제 생각에도 재갈을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품기 전에 너무나 많은 내 생각으로 온갖 말을 했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성령님이 오셨으니 그 성령님을 더욱 의식하고 더욱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빠르게 하옵소서! 그리해야 내가 살겠나이다! 그리해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겠나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면서도 자꾸 외면하고 회피했던 것을 용서해주시고 다시금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은 어느날 갑자기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을 선택하신 것인지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향해 복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창 12: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나라와 네 친척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 12:2) 내가 너를 큰 나라로 만들어 주고, 너에게 복을 주어,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창 12:3) 너에게 복을 주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을 내가 저주하겠다.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12장과 13장에는 아브람이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12:8) 그리고 나서 아브람은 세겜에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갔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 장막을 세웠습니다. 서쪽은 벧엘이었고, 동쪽은 아이였습니다. 아브람은 그 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4) 그 곳은 아브람이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 13:18) 그리하여 아브람은 자기 장막을 옮겼습니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큰 나무들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 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서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배격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되게 해달라고 빌면 안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소위 기복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와 Give and Take의 거래를 하는 듯한, 그래서 자꾸 사람 편에서 '하나님이 저한테 이거 해주시면 저도 이거 할께요'라는 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복'의 행위를 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복을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복을 구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사실은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더욱 깨닫게 되는 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어떤 점을 보시고 그를 고르셨는지는 하나님만 아시겠으나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 12: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롯도 아브람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갈 것에 기꺼이 순종하여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가는 곳곳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제단을 쌓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부러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은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복의 선포와도 같다. 그것은 이미 선포되었으나, 순종하는 자에게서만 성취가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깨닫게 된다. 

 

아직 아브람이 뭘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향한 복을 선포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란 참으로 절대적이며, 일방적이고, 또한 확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요일 4:19, 쉬운성경)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롬 5:8, 쉬운성경)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롬 11:29, 개역개정)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Give and Take의 거래 관계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일방적으로, 절대적으로 사랑하셨고, 그냥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 그 부르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만 그 부르심에 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아브람을 불러 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절절한 일방적인 사랑도 없다 싶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이후에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서 선포하신 복을 아브람에게 정말로 줄 만하다, 아브람이 정말로 그 복을 받을 만하다고 여기시며, 당신의 선택에 대해 기쁜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까^^

 

아, 오늘의 묵상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내가 사람의 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정말 엄청나다. 우리가 할 것은 그렇게 먼저!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화답하며, 나 또한 사랑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 뿐인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을 구하고, 문제해결을 위해서의 목적이 아닌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나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이다. 

 


 

절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복을 보면서 이미 그 복이 내게도 선포되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가 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고 하나님께 예배의 제단을 쌓았듯이 그렇게 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고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다른 어떤 이유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 자체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마땅한 것인데, 자꾸만 이 땅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가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사람인양 생각했던 나의 무지함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해야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심으로 이미 태초부터 온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누리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은 온 세상 가운데 충만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과 복이 가득함에도 늘 나의 문제를 앞세우며 그것이 당장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힘들어하고 우울해하고 괴로워했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고 이미 온 땅 가운데 충만히 선포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으로 나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참으로 좋으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 1:2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그들의 자녀들로 땅을 채우고, 땅을 정복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다른 생물들(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창 6:5)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았고, 하나님은 다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창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워라.
(창 9:2) 땅 위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들을 두려워할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주었다.

(창 9:7) 너희는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에서 번성하여라.”

 

창세기 1장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다. 역시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홍수 심판 이후에 모든 생물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하시며 그 생물들을 사람에게 주었다 하시니 역시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말씀하신대로 사람에게 다른 생물들을 다스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대홍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구원을 받은 노아의 자녀인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기의 꿈, 자기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창 11:4) 그들이 또 서로 말했습니다. “자, 우리의 성을 세우자. 그리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성...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

우리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일관적으로 사람에게 주셨던 명령과 아주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맡기셨는데, 사람은 하늘에 닿고자 했다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땅을 채우고 번성하라 하신 것인데,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대적하는 계획을 도모했던 것이다. 

 

(창 11: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쌓고 있는 성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창 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 백성이고, 그들의 언어도 다 똑같다. 그래서 이런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 일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들은 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창 11:7) 그러니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자.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 11:8)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은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창 11:9)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그 곳에서 뒤섞어 놓으셨으므로, 그 곳의 이름은 바벨이 되었습니다. 또한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 위에 흩어 놓으셨다. 즉,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진짜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그 자리에서 바로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 바벨탑 사건에서 선포된 것이다! 할렐루야!

 

이 바벨탑 사건을 보면 사람의 눈으로는 자기의 계획이 무너지고 자기 꿈이 좌절되고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다스려진다는 것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질서대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사실 나에게도 많은 꿈과 계획이 있으나 그것이 100퍼센트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세운 것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소망 가운데 여러가지 꿈을 꾸고 계획을 가졌지만 그게 정말 순수한 하나님의 뜻일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나 방법에서 내가 모든 걸음을, 때마다의 선택을, 성령님께 신중하게 물으면서 응답을 받을 때에야 움직여서 여기까지 왔던가?를 생각해보면 '아니, 내 마음대로, 내가 생각했을 때 옳다고 여긴대로, 내가 보기에 좋았던대로' 했던 것이 훨씬 더 많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놓고서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계획했잖아요 라고 하는 나의 말이, 오늘 본문 말씀 앞에서는 참으로 궁색해진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나의 꿈, 나의 계획은 흩어지게 되어있다. 그게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위해서 갖고 있는 나의 꿈이나 계획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인가? 그게 뭐가 문제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철저히 신본주의적인 관점으로 살겠노라 결단한다면 나의 꿈을 꾸고 나의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을 품고,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해서 그것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벨탑에서 얻는 교훈이다.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 온 세상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크고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제 안에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 경외함이 부족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옳은 소견대로 해왔었는지요. 주여, 용서해주시옵소서! 매일의 소소한 것들 뿐만 아니라 제 삶에서 이루고 싶은 큰 일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여쭙고 하나님의 방법을 듣고 순종하여 이루어가기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이해해주실거야 라고 제 임의로 생각하고 제가 하고싶은대로 해왔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범위 안에서는 제가 마음껏 선택하고 결정해도 좋다고 하시겠으나, 이제는 더욱 세세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세밀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고 주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나의 뜻, 나의 계획이 흩어질 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진실로 주님 앞에 겸비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 6:9) <노아와 홍수>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창 6:10) 노아는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함과 야벳이었습니다.

(창 6:11) 이 때에 땅 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고온 땅에는 폭력이 가득 찼습니다.
(창 6:1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타락함을 보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더럽힌 것입니다.

(창 6:13)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서 나는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을 땅과 함께 다 쓸어 버리겠다.
(창 6:14) 너는 잣나무로 배를 만들어라. 그 안에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에 역청을 칠하여라.
(창 6:15) 그 배는 이렇게 만들어라. 길이는 삼백 규빗 , 너비는 오십 규빗 , 높이는 삼십 규빗 으로 만들어라.
(창 6:16) 지붕 위에서 일 규빗 아래로 사방에 창을 만들고, 배 옆에는 문을 내어라. 배를 위층과 가운데층과 아래층으로 삼 층을 만들어라.

(창 6:17) 내가 땅 위에 홍수를 일으켜서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생물, 곧 목숨이 있는 것은 다 멸망시킬 것이다. 땅 위에 있는 것은 다 숨질 것이다.
(창 6:18) 그러나 내가 너하고는 언약을 세우겠다.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은 모두 배로 들어가거라.
(창 6:19) 그리고 모든 생물을 암컷과 수컷 한 마리씩 배로 데리고 들어가서 너와 함께 살게 하여라.
(창 6:20)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이 각기 그 종류대로 두 마리씩 너에게로 올 테니, 그것들을 살려 주어라.
(창 6:21) 그리고 먹을 것도 종류대로 다 모아 두어라. 그것을 배 안에 쌓아 두고, 너와 짐승들의 식량으로 삼아라.”

(창 6:22)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함께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바로 베드로후서 2장 5~9절 말씀이다. 

(벧후 2:5) 또한 오래 전,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한 행실을 하던 사람들을 홍수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던 노아와 일곱 식구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벧후 2:6) 그리고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려 잿더미로 만드시고, 훗날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벧후 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의로운 롯은 그 성의 사람들이 방탕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며 괴로워하였습니다.
(벧후 2:8) 은 선한 사람이었기에 이웃들이 날마다 행하는 악한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벧후 2:9)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을 어떻게 구원해야 할지 아시고, 큰 어려움이 닥칠 때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심판날까지 계속 벌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6:9~22와 베드로후서 2:5~9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는 딱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노아와 같은 사람 - 그가 사는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구원받음 / 자기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구원의 길로 인도함)
  • 과 같은 사람 - 이웃들이 행하는 악한 일들을 보고 들으며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 소돔과 고모라(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악함을 괴로워만! 하는 사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뱉어버림을 당할 수 있는 사람 (구원 못 받음 / 자기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망하는 길로 인도함)
  • 멸망 당하는 사람 - 타락하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사람 (구원 못 받음 / 심판날까지 계속 벌을 받음)

혹자는 이 분류를 볼 때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내내 하나님을 향한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이 '너~~무 그렇게 극단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돼',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돼'라고 하는 것일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인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구원의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셨다. 

(개역개정,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쉬운성경,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마 7:14)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나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노아의 당시에 땅 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였고, 온 땅에는 폭력이 가득했던 것이 정말로 지금의 시대, 곧 말세에 날마다 더욱 가까워지는 이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심판 또한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했던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고 인도해주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롯과 같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은 가졌으나 그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세상과 영합한 삶을 산 자에게는 결국 딸들이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며 자식을 낳게 되고 그 자식들이 후에,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압과 암몬 백성이 되는 저주가 임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성경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신앙생활의 깊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노아와 같이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고 싶어지고, 세상으로부터는 구별되고 싶고, 하나님께서 비밀을 나누어주시는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런 자를 향해 세상은 마른 땅에서 배를 만드는 미친 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노아처럼 세상이 무어라 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결단한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으시고 그가 무엇을 해야할지 세세하게 알려주신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정신없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속상해하고 두려워하는 롯처럼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떠하든 이 세상의 최종 권위가 하나님께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결국에는 심판하실 것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산다면 그는 노아와 같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그의 가족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받게 되는 것이다. 
 
기억하자! 세상은 극단적인 믿음이라 말할지라도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고 흠없이 살아가는 극단적인 신앙이 아니고서는 이 말세의 때에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 세상의 어떠함을 보며 울분을 터트리고, 세상을 한탄하는 것이 옳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님을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이 말세가 되어갈수록 더욱 악으로 치닫고 타락할 것은 이미 성경에 내내 예언되었던 것인데도 그 세상을 바라보며 괴로워만 하고 있다가는 롯과 같이 멸망하게 될 것을 알게 하시니, 이제는 자꾸만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세상을 누리며,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것을 결단합니다! 
 
주여, 더욱 예수에 미친 자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이 무어라 하든 좁은 문, 협착하지만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나 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 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 안에 자꾸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자리, 세상을 누리려는 자리가 진리의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고, 스스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성령님께서 부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저를 살리시기 위해 오늘의 이 말씀도 주셨음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One way to Jesus! 오직 한 길로만 나아가는 제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3장 14~24절을 보면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온 후에 하나님께서는 뱀, 하와, 아담 각자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심을 알 수 있다. 

 

뱀이 받은 저주

  •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음
  • 평생토록 흙먼지를 먹고 살아야 할 것
  • 여자와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될 것

(창 3:14)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했으므로, 너는 모든 가축과 모든 들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배로 기어다니고, 평생토록 흙먼지를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창 3:15) 내가 너와 여자를 서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도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부수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물 것이다.”

 

하와(여자)가 받은 저주

  • 아기를 가지는 고통이 클 것이며,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
  • 남편을 지배하고자 하나,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게 될 것

(창 3:16)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기를 가지는 고통을 크게 하고, 너는 고통 중에 아기를 낳게 될 것이다.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아담(남자)가 받은 저주

  • 아담(남자)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평생토록 수고해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
  •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

(창 3:17)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러므로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창 3:18) 땅은 너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너는 밭의 채소를 먹을 것이다.
(창 3:19) 너는 먹기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하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네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시고, 각각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은 분명하고, 정확하며, '그냥 없던 것으로 쳐줄께' 하는 자체가 불가하신 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내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는 것을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은!

진정한 본질적인 대책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 당신께서 마련하시고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뻗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창 3:2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온 근원인 땅을 열심히 갈게 하셨습니다.
(창 3:24)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쫓아 내신 뒤에 에덴 동산 동쪽에 천사들을 세우시고 사방을 돌며 칼날같이 타오르는 불꽃을 두시고,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저지른 죄(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음에도 그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태초부터 존재했던 어둠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린 것)로 인해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리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벌거벗었다는 것에 눈이 밝아져 두려움으로 숨었다. 그것이 그들 깜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죄의 대속'이 될 수 없었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수습할 수 있는 '온전한 방법'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1. 동물 가죽(예수님의 예표)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셨고 
  2.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된 채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막고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3. 에덴동산 동쪽에 천사들을 세우시고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불꽃을 두시고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다. 

즉, 세상을 '질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온전하고도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신 사랑'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다. 

 

사람은 항상 본인의 죄로 인해 댓가를 치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많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와가 뱀의 탓을, 아담이 하와의 탓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혹은 죄의 댓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너무 심하지 않느냐?'라고 내가 치르는 댓가가 너무 크다고 항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한 것에 대한 댓가는 분명히 치르게 하시는, 셈에 능하시고 정확하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온 우주가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질서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감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선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는 의와 공의이기 때문에(시 89:14) 하나님으로서는 죄를 지은 장본인들이 치러야 할 댓가를 치르게 하시지만 본질적인 대속, 즉 죄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죄의 저주를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본질적인 대속의 방법에 대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사람이) 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더욱 크고, 위대하고, 놀랍고, 사랑 그 자체이신 대책을 갖고 계시며,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그것이 알파요,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내가 감당한다고 여기는 정도는 말 그대로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질서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영역에서 본질적인 일을 이루시는 분인 것이다. 그것이 진실로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신,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이다. 그것에 감격하고 그것에 감사하자!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가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깨닫지 못하는 영역에서 나를 책임지시고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순간 순간 망각하고 내 입장만 하나님께 토로했던 어리석고 못난 저를 용서해주세요. 

 

내 죄로 인한 댓가치름의 기간을 억울하다 여기지 말고, 본질적인 해결방안을 이미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며 내 편에서 해야하는 순종을 주께 올려드리게 하옵소서.

 

대책은 주님께 있습니다. 해결은 주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좋으신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잊고 자꾸만 내 스스로 아등바등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고아의 영성을 버립니다! 철저히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시고 존귀하시며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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